卍 ~ 어둠속 등불

식은 밥 한 덩어리에 맺힌 원한

갓바위 2021. 3. 6. 09:46

 

변산 월명암은 예로부터 수도도량으로 유명하여 큰 스님들이 많이 수도한 곳이다.

월명암에서 수도하여 도를 깨친 대사 한 분이 절 뜰 앞에 서 있었다.

 

그 때 큰 멧돼지 한 마리가 절 아래에서 정신없이 달려왔다.

월명암으로 들어온 멧돼지는 어디로 갈 줄 모르고 헤매고 있었다.

 

불쌍히 여긴 대사가 월명암 마루 밑 문을 열고 들어가도록 한 후

상좌에게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을 떠오도록 하였다.

 

"스님, 멧돼지 못 봤습니까?

내가 멧돼지를 잡으려고 따라오다가 월명암 근처에서 놓쳐버렸습니다."

 

"본것도 같고 안 본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비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니 멧돼지를 잡기 전에 먼저 죽게 생겼소.

여기 시원한 냉수나 한 그릇 드시오."

 

목이 마른 포수는 대사가 주는 냉수 한 그릇을 벌컥벌컥 마셨다.

"멧돼지는 다 잡게 되어있으니 멧돼지를 잡기 전에 내 이야기나 한 번 들어보시오."

 

"사냥을 하는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까. 멧돼지 간 길이나 일러 주십시오."

"이쪽으로 간 것도 같고 저 쪽으로 간 것도 같으니 알아서 가시오."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빨리 이야기 하시고 알려주십시오."

대사는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예로부터 변산에는 명당이 많기로 소문이 나 지관들이 많이 찾아 다녔습니다.

하루는 지관 한 사람이 명당을 찾아 변산 산중을 다니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한참을 헤메다가 겨우 벌초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친 몸을 쉬다가 보니 묘지 옆 소나무에 도시락이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산속을 헤매느라 몇 끼니를 굶은 지관은 시장기가 더욱 발동하였습니다.

벌초가 끝난 그 사람은 옆에 사람이 있어도 본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먹어보란 말도 안고 혼자만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 보았지만 본 체도 하지 않았고 이제 도시락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관은,'이보시오. 내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느라 몇 끼니를 굶어서 기갈飢渴이 자심이오.

밥 한 수저라도 내게 요기를 하게 해주오.'

 

그러자 벌초하던 사람은,'도시락이 몇개라도 모자랄 지경인데

남 줄 밥이 어디 있습니까?' 라며 다 먹어버렸습니다.

 

기갈이 극심했던 지관은 원한을 가득 품고 그자리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그사람은, '죽으려면 다른 곳에서 죽을 일이지 하필 남의 묘지에서 죽어.

 

별 재수 없는 꼴을 다 보겠네."

라며 작대기로 지관의 시신을 한쪽으로 치워버렸습니다.

 

원한을 가득 품고 죽은 지관은 결국 독사로 태어났습니다.

벌초하던 사람은 해마다 그 묘지에 와서 벌초를 했습니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벌초를 하고 도시락을 먹은 후 가까이에 있는

옹달샘에 가서 물을 먹으려는 순간 독사가 그만 입을 물어 버렸습니다.

독이 온몸에 퍼져도 어찌할 방도가 없어 그 자리에서 죽으며,

 

"남의 머슴 사는 놈이 벌초를 한다고 산중까지 와 물 좀 먹는데,

네가 나에게 어떤 원수가 있어서 입을 물어 죽게 해."

하면서 원한을 품었습니다.

 

독사에게 물려 죽은 사람은 멧돼지의 몸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몇 해가 지나자 변산 산중에 멧돼지 한마리가 나타나 뱀이라는 뱀은 다 잡아먹고 다녔습니다.

 

멧돼지에게 잡혀먹힌 독사는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포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포수는 다른 짐승은 잡지 않고 멧돼지만 보면 다잡아 씨를 말리려고 했답니다."

 

대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포수는 눈물을 죽 흘렸다.

"그 이야기가 바로 제 이야기만 같습니다."

 

"바로 당신 이야기입니다. 멧돼지를 잡고 나면,

멧돼지는 다시 당신을 잡기 위해 무엇으로 태어날 지 모르니 어찌하렵니까?"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원망을 다 놓아버리고 갚을 자리에 참아버리면 되니 총부터 버리시오."

 

포수는 총을 주춧돌에 던져 두 동강을 내었다.

"멧돼지는 이 마루 밑에 있습니다, 어찌하렵니까?"

"잡지 않으렵니다."

 

포수는 '식은 밥 한 덩어리가 원한이 되어 이렇게 원한이 끊이지 않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겨 머리를 깍고 대사의 상좌가 되었다.

 

수도에 정진한 포수는 마침내 인과의 이치를 깨달았다.

그래서 월명암에는 인과의 이치를 깨달은 큰 대사 두 명이 나왔다고 전해오고 있다.

변산 포수 이야기와 유사한 내용이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 석대암의 연기 설화로도 전해오고 있다.

석대암의 연기설화가 설화의 원형일지는 모른다.

설화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를 가지며 구전되기 때문이다.

 

소태산 대종사의 한 제자가 어떤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고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본 소태산 대종사가 말씀하셨다.

 

"네가 갚을 차례에 참아 버려라.

그러면 그 업이 끊어지려니와 네가 지금 갚고 보면 저 사람이 다시 갚을 것이요.

이와 같이 서로 갚기를 쉬지 아니하면 그 상극의 업이 끊일 날이 없으리라."

 

남이 지은죄와 복을 내가 대신 받을 수도 없고,

내가 지은 죄복을 남이 대신 받아갈 수 없는 것이 인과의 이치이다.

그 업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갚를 자리에 참아버리는 방법 외에 또 다른 길이 있을까?

-인연산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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