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 스님
칠십을 한참 넘긴, 그래도 곱게 늙은 보살님이
어여쁜 20대 손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가난, 가난해도 ‘얼굴 가난’만큼 서러운 게 없단다.”
지금도 그런대로 봐드릴 만한 얼굴이다.
젊었을 적엔 인물값 했을 것 같은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 더욱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그렇다면 현재의 저 차분한 얼굴은 기도 수행의 결과란 말인가?
그 시절에는 성형외과도 없었을 텐데? 이른바 얼짱시대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 ‘몸짱’까지 함께 요구된다.
그 와중에 ‘못생긴 건 용서해도 뚱뚱한 건 용서할 수 없다.’는 새로운 유행어까지 횡행한다.
하긴 그 말이 맞긴하다.얼굴이야 부모 탓이라고 할 수 있지만
비만은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한 자기 책임이기 때문이다.
순 임금은 키가 매우 작았지만 오늘날까지 성군소리를 듣고 있다.
나폴레옹 콤플렉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나폴레옹은 키가 작았다.
공자는 머리통이 언덕같이 평평하게 생겨 공구(孔丘)라고 이름지었다.
혜능선사 역시 등신불을 보면 인물이 별로였고 방아를 찧을 때
몸무게가 모자라 돌을 허리춤에 찼다는 것으로 보아 덩치도 왜소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들은 신체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장식하고 있으니 범부와는 차별성을 가진다.
링컨은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타고난 부분이 있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지만
후천적으로도 얼마든지 자기 분위기를 아름답게 연출해낼 수 있다.
그래서 관상학에서도 면상(面 相)보다 심상(心相)을 더 강조한다.
아름다운 마음씨와 수행으로 가꾼 투명하고 맑은 얼굴을
어찌 말초적인 성형미인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불가에서는 '다음 생에는 더욱 미인으로 태어나라'는 덕담을 한다고 한다.
준수한 용모와 균형 잡힌 건강한 몸매로 태어나는 것 자체가 큰 복이라고 말하는
스님은 그래도 아름다운 마음씨와 수행으로 가꾼 투명하고 맑은 얼굴을
어찌 말초적인 성형미인에 비교할 수 있겠느냐며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밝혀야 하는
자기 내면세계의 반조를 게을리 한 채 외형적인 것만 추구하고 바깥으로만 치닫는 풍토를 경계한다.
기존에 내가 해오던 일이나 추구해온 가치관이 문제가 있거나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도 어리석음, 자존심, 기득권 혹은 명예심 때문에
끝까지 고집하고 우기는 것도 얼굴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완전한 중생의 몸으로 살면서 허물이 없을 수는 없지만 허물을 짓고도
참회할 줄 모르는 것이 더 큰일이라고 말하는 스님은 승속을 막론하고
자기 합리화만 늘어가는 이즈음의 세태를 보면서 자기반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세 치 혀의 화려한 수식어로 남이야 수백명도 속일 수 있지만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는 이기심을 가진 존재였지만 오늘의 나는 이기심을 덜어낸
새로운 존재다 하루하루 아름다워지는 당신이 얼굴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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