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어디에 있나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러우니
꽃다운 풀 헤치고서 그대는 보았는가.
설사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먼 하늘 향한 콧구멍 어찌 숨길 수 있으랴.
- <곽암선사 십우도 2. 見跡>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는 세존의 질문에 아난존자가 어떠한 답변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일단 이 질문 자체에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규명하기에 앞서, 과연 마음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인지를 먼저 밝혀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어디’라는 데에 의미가 있겠지만,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어디’라는 데에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석존의 제자인 아난존자보다 달마대사의 제자인
2조 혜가대사가 뛰어났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내놓아보라는 달마대사의
말에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얻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솔직담백하게
대답하였다. ‘불안한 마음’을 막상 찾으려하니 실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냥 막연히 불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
마치 물거품 이슬과 같아
‘어디 있느냐’ 하면 愚問
일곱 곳에서 마음의 소재를 찾고자 한 아난존자와, 단번에 마음에 실체가
없음을 간파한 혜가대사의 차이는 결국 교(敎)와 선(禪)의 입장
차이를 나타내주고 있다. 어지럽게 여기저기서 마음을 찾아 헤맬 것인가?
단박에 마음에 실체가 없음을 알아챌 것인가?
사실 마음이라는 것도 몸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마음은 있다. 하지만 몸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은 마치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그리고 이슬과 번갯불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과 같다.
이 여섯 가지 것들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연(緣) 따라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연(緣) 따라 느닷없이
사라지는 이러한 것들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이다.
우주를 누가 창조했느냐는 질문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주를 누가 창조했는가를 따지기에 앞서,
과연 우주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인지 규명되어야 한다.
과학적 연구결과에 따르자면, 우주도 결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는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걸 단순화시켜 누가 우주를 창조했느냐고 묻는다면 우문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 대해 ‘신’이 창조했다고 답한다면 그야말로 우문우답(愚問愚答)이 된다.
그렇다면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우주를 창조한 신은 과연 누가
창조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아마도 신은 “본래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라고 답할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주만물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본래 하나님을 창조한 분은 부처님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바로
최초의 한 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처님은 본마음을 말한다.
본마음에서 한 마음이, 그리고 한 마음에서 다수의
분별심이 일어나서 천차만별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월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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