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복죽
세상을 핥고 온 겨울비를 찢어진 우산에 담고 손수레를 끌고 편의점 앞에
멈춰 선 할아버지는 "이 박스, 내가 가져가도 되겠어요?"
"저... 그건 다른 데 드릴 곳이 있어서 안 됩니다."
머뭇거리다 외마디 비명 같은 말을 뱉어놓고 들어가 버린
알바생의 흔적을 지우고 뒤돌아서 가려던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비 맞고 계시지 말고 잠시만 들어오세요."
말이 아픔이 되어 지나간 자리에 머물다 들어온 할아버지에게
일회용 커피를 내밀며 "이거 드시면서 몸 좀 녹이고 가세요."

"아이고...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나."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 향에
행복 한 잎을 베어 문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노인은 상품 진열장
한곳에 고정된 채 눈을 떼지 못하더니. "잘 먹고 가요."
"빗길에 위험하니 그만 들어가세요, 할아버지."
아파 몸져누운 아내를 두고 자신만 먹은 것이 미안해서인지 초조한 얼굴에
짙은 어둠을 그려 넣은 채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가고 있었습니다.
"임자... 나왔어." "비 오는데 나가서 걱정했잖아요."
먼지 한 톨 안을 수 없는 몸으로 폐지를 주워 아픈 아내의 죽이라도
살 수 있을까 싶어 나선 걸음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채,
빈 솥단지가 내걸린 부엌으로 들어가려던 할아버지는
손수레 바닥에 서너 장 있는 박스가 비에 젖을까
투박한 손끝에 매달려 온 세월을 안듯 들어 올리는 순간,
그 안에는 할아버지가 눈을 떼지 못했던 전복죽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어느새 그 위에 놓인 손편지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는데요
[비 오는데 고물상까지 가시다가 행여 다치실까 봐 그랬어요.
전복죽 따뜻하게 데워서 할머니랑 맛있게 드세요.
내일 오실 때까지 박스는 제가 잘 보관해 놓을게요.]

세상이 멈춰 선 그 자리에서 손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할아버지의
길고 깊었던 눈에서는 까닭 잃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디딘 발자국마다 시린 가난을 안고 펼쳐진 이불과 늘 한 몸이었던
아내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전복죽을 먹고 있었습니다.
먼저 나와 버린 눈물로 간을 맞춰가면서....
펴냄 / 노자규의 골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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