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 어둠속 등불

쇄수관음

갓바위 2021. 5. 7. 10:55

방경일글ㆍ남종진그림 

 

쇄수관음의 쇄수灑水는 '물을 뿌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쇄수관음도는 관세음보살이 물을 뿌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만약 남종진 화백의 그림에서처럼 구름 위의 관세음보살이 정병을 기울여

감로수를 붓는다면 아마 아래의 절에서는 감로의 비가 내릴 것이다.

 

버들가지를 감로수에 축여서 뿌리건 병을 기울여

직접 감로수를 붓건 우리가 보는 쇄수관음도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런데 쇄수관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난 과정은 평화와 거리가 멀다.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입했을 때의 일이다.

송나라의 곳곳을 휘젓고 다니던 금나라의 병사들이 고소故蘇에 들이닥쳤다.

 

이렇게 되자 난을 피해 고소 일대에 몰려든 수십만 백성의 목숨이 위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송나라 병사들은 힘을 다해 금군과 싸웠지만 지고 말았다.

 

송나라 병사의 저항에 고전을 한 탓에 화가 난 금나라 병사들은

고소 일대의 백성들을 보이는 족족 죽이기 시작했다.

 

이때 홀연히 아름다운 중년의 부인이 나타나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는

그 위에 올라가 <<대비주경大悲呪經>>을 읽으며 중생을 구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버드나무 가지로 정병 안의 감로공덕수를

사방에 뿌려 망자들의 영혼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상황은 호전 되었다.

 

그녀가 몰려든 사람들에게 경을 설한 뒤 자신의 본 모습을 나타내니 관세음보살이었다.

이때부터 고소 사람들은 경을 읽고 감로수를 뿌리는 모습의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는 쇄수관음이라 부르며 공양하기 시작했다.

고소는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 지역을 말한다.

수(隋 581~618)나라때 중국의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대운하가 개통되자

강남에서 생산되는 쌀을 모아 강북으로 보내는 곳이 된 고소는 경제적으로 크게 발달한다.

 

이런 고소에 수십만 명의 피난민들이 모여든 것은

송 宋나라와 금(金 1115~1234)나라의 전쟁 때문이었다.

 

송나를 세운 조광윤(趙匡胤 927~976)은 무인 출신이었지만 그의 후손인

황제들은 무인보다는 문인을 우대하는 문치주의文治主義정책을 폈다.

 

이렇게 되자 국방력이 약해져서 북방의 강국인 요(遼 916~1125)나라에 해마다

세폐(歲幣 일종의 조공)를 바치고 평화를 유지했다.

한마디로 돈으로 평화를 산 것인데 이는 군사력의 약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런 가운데 북방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나타났다.

원래 여진족은 요나라의 위세에 눌려 지내고 있었는데

아골타라는 영웅이 나타나 부족을 통일하고 나라를 세웠다.

 

금이 요를 공격하자 성은 사신을 보내 금과 동맹을 맺고 요를 공격했다.

하지만 동관(童貫 ?~1126)이라는 내시가 지휘하는 송의 군대는 망해가는

요의 군대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

 

결국 요의 근대는 금의 군대에 의해 궤멸됐는데 이 과정에서

금은 송의 군사력이 얼마나 허약한지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1125년에 금의 대군이 송을 침입했다. 금의 기병은 하루에 2,000리(약800킬로미터)를

진격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였을 것이다.

 

수도인 개봉開封이 포위당하자 송이 황제는 또 돈으로 평화를 구걸하는 방법을 썼다.

금의 군대는 엄청남 배상금을 받고 돌아갔다.

 

금의 군대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자존심이 상한 송의 황제와

대신들은 금과 전면전을 선포하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금의 군대는 다시 침입하여 40여일 만에 개봉을 함락시키고는 휘종(徽宗 1082~1135)과

그의 아들 흠종(欽宗 1100~1161), 황족이나 대신과 그들의 가족, 스님과 장인 등

수만 명을 금의 수도로 잡아갔다.

 

물론 개봉의 국고國庫에 들어 있던 수천만 냥의 금은보화와 비단, 골동품 등도

모두 금의 차지가 되었다. 이렇게 송은 망하고 개봉은 철저하게 약탈되었다.

 

하지만 흠조의 아우인 당왕康王이 지방에서

황재(高宗 1107~1187)로 즉위하자 꺼져가던 불씨가 되살아났다.

 

이에 금의 대군은 고종이 있는 양주陽州를 습격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고종을 잡지 못했다.

고종은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지역으로 탈출했으나 양자강을 건너 공격해온

금의 군대를 피해 다시 온주(溫州 절강서의 남동쪽 끝에 위치)로 도망쳐야 했다.

 

1129년 가을에 있었던 이 공격에서 금의 군대는 강남 각지를 공격했다.

위의 이야기에 나오는 고소 지역의 피난민들도 이때 금군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리적으로 볼 때 고소는 항주를 목표로 하여 남진하는 금군의 공격로에 위치해 있다.

금군은 양자강을 건너자마자 마주친 피난민들을 병사들로 오인해 공격했을 수 있다.

 

아니면 피난민인 줄 알았지만 그 수가 워낙 많고

적병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랬을 수도 있다.

 

사실 적지에 들어온 금나라 군대에게는 그들을 피해

도망친 수십만의 민간인들이 위협적인 세력이었을 것이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봐도 금군이 남쪽으로 내려가 항주를 공격할 때

피난민들이 무장해서 그들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은 좋은 작전이다.

그렇다고 해도 무방비의 민간인들을 살해한 것은 전쟁범죄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금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강북의 백성들이 강남으로 내려온

가장 큰 이유는 금의 군대가 너무 잔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풀을 베듯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본 강북의 백성들은 거의 모두가 강남으로 피신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인구이동이었는데 이 덕분에 강남 지역은 이후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된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민간인의 대량 살육이 발생한 고소가 보타락가산과 가깝다는 것이다.

고소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상해上海가 나오고, 상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주산열도가 나온다.

 

주산열도는 줄지어 있는 섬들이 달리는 배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나 백제, 일본의 상인들은 이 주산열도를 보며 당나라나 송나라로 드나들었다.

 

아무튼 당나라 때부터 사람들은 이곳 주산열도의

보타락가산에 관세음보살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이야기가 아주 잘 풀리려면 사람들이 살해되기 전에

관세음보살이 손을 써서 수십만의 피난민들을 살렸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피난민들이 관세음보살을 찾지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의 업보가 관세음보살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늦게나마 나타난 관세음보살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심리적으로 안정시킨 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이다.

 

더구나 사방에 감로수를 뿌린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콜레라가 유행한 아이티 지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지역에서 사람이 많이 죽게 되면 전염병이 생기게 된다.

 

금군의 공격에서 가족과 친지들을 잃고 살아남은 피난민들도 그러한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대처할 정신도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나 예방조치를 취해 준 관세음보살은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사람들이 감로수를 뿌리는 관세음보살상을 만들고 공양을 올리지 않았겠는가?

쇄수관음은 <보문품>의 게송들 가운데 '비悲의 몸은 천둥처럼 진동하고

자 慈의 뜻은 오묘한 구름이 되어 감로의 법우法雨를 골고루 내려

번뇌의 불길을 꺼준다'는 구절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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