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여관음의 일여一如는 '하나와 같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물들과 사건들이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들은 모두 다른 것이다.
하지만 불보살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원래 같은 기원과 같은 이치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사건들과 사물들은 하나이고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일여가 하나와 같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일여관음은 위와 같은 관점에 의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의 바라는 바가 모든 하늘에 두루 미치게 한다.
다시 말해 일여관세음보살은 하늘과 관련해 중생들이 바라는 바를 모두 들어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은 '하늘이 노했다.고 할 때의 하늘이다.
하늘이 노했다는 것은 천둥이나 번개, 폭풍, 폭우, 가뭄 등으로 알 수 있다.
일여관세음보살은 하늘이 만드는 이런 현상들을 모두 하나로 보고 통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이 노했을 때 일여관세음보살을 찾았다.
송나라의 진종眞宗 상부祥符 7년(1016) 9월에 메뚜기 떼가 하늘을 뒤덮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해마다 가뭄에 시달리고 메뚜기와 같은 곤충이나 벌레에 의해 재해를 당하자
황제는 여러 가지 대책을 시행하도록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이에 황제는 중앙의 관리를 파견하여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게 했다.
이날 오시(五時 정오 무렵)가 되자 홀연히 검은 구름이 다가오더니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쳤다.
이어 비와 우박이 마치 돌과 화살처럼 쏟아졌는데 그 소리가 포소리와 같았다.
들판과 하천을 뒤덮고 있던 메뚜기 떼가 순식간에 섬멸되었다.
황제와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심을 내었다.
<<천축지天竺志>>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이 바로 일여관음이다.
중생들의 기도에 응답해 비와 우박을 한꺼번에 보내어 가뭄을 해소하고
메뚜기도 물리친 것으로 일여관세음보살은 기상을 만드는 요인들을 통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여관세음보살이 비나 우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비나 우박을 만드는 먼지알갱이, 공기의 온도와 습도,
바람의 방향 등을 움직여 비나 우박이 내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일여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정신력이 모여서
만들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혼자서 기도하는 경우는 어떨까?
청나라 때 상서성의 부양浮梁현 사람인 염정소簾程昭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기를 조금도 쉬지 않았다.
도광기사년에 북쪽으로 가면서 큰 강을 건너게 됐는데 미친 바람이 크게 불었다.
성난 파도와 세찬 물살이 솟구쳐 올랐다.
염 거사는 지성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불러 다행히 난을 면할 수 있었다.
<<남해일작南海一勺)에 나오는 이야기다.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염 거사와 같이 관세음보살을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그랬다면 앞에서 본 이야기처럼 여러 사람들의 정신력이 합쳐진 경우다
하지만 염 거사 혼자의 힘이었다면 그는 정말 대단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비록 특정한 기상상태를 만들거나 바꾸는 것은
일여관세음보살의 힘이지만 그런 일여관세음보살을 움직이는 것은 기도자의 정신력이다.
따라서 기도에 의한 구원을 단순하게 다른 존재에 의해
구제받는 타력신앙他力信仰이라고 하면 곤란하다.
당나라의 삼장법사인 현장 스님의 경우도 좋은 실예다.
천축(天竺 인도)의 불경을 구해서 보고 싶었던 현장 스님은 황제의 명을 어기고 길을 떠났다.
운 좋게 서쪽 국경을 통과하고 나니 스님은 혼자서 사막을 건너야 했다.
그때부터 스님은 나쁜 날씨, 더위와 갈증, 추의와 배고픔,
도적, 감옥, 귀신과 요괴, 애정문제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경전을 구하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현장 스님의 정성은 관세음보살을 감동시켰다.
이처럼 하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를 도운 보살은 일여관세음보살이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 경우에는 오로지 현장스님 한 사람의정신력으로 관세음보살을 움직인 것이다.
스님은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했고 그 덕분에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다.
무사히 당나라로 도아와서 남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보면
스님이 관세음보살에게서 도움을 받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렇다면 일여관음은 어떤 모습일까?
일여관음의 전형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다.
천의天衣를 입고 연화좌대 위에 앉아 있다.
오른손은 뉘여서 배꼽 언저리에 대고 왼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다.
왼쪽 무릎은 세워져 있고 오른쪽 다리는 양반자세다.
필자가 이대로 따라해 보니까 좀 특이한 자세가 된다.
번개와 천둥 등을 부리는 보살의 자세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그슬 등으로 장식하고 있는 점은 다른 보살들과 같다.
그런데 남 화백의 일여관음도에 등장하는 보살은 앞에서 살펴본 모습과는 좀 다르다.
보관이나 장식품, 천의 등은 있지만 일여관세음보살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서 있다.
그리고 구름 위에서 두발로 작은 연화좌대 두 개를 각각 밟고 있으며
두 손은 앞으로 모아서 교차하고 있다.
이렇게 구름을 타고 비행하는 일여관세음보살의 모습은 또 하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앞으로 뻗고 있는 두 손의 집게손가락은 당장이라도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릴 것 같다.
허나 남 화백의 일여관음도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배경이 하늘이 아니라
우주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늘이라고 불리는 존재의 실체는 바로 저 우주다.
우주를 배경으로 서 있는 일여관세음보살은 우주와 하나다.
그리고 보살은 우리에게 '너도 우주와 하나다'라고 말하더니
나아가 '너와 나도 하나다'라고 말한다.
독자 여러분은 그렇게 말하는 일여관세음보살의 목소리가 보이지 않는가?
우리가 일여관세음보살과 하나라면 관세음보살이 그러하듯이
우리 역시 관세음보살의 목소리를 볼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이런 까닭으로 관세음보살 기도는 타력신앙인 동시에
자신의 힘으로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는 자력신앙인 것이다.
불순한 일기를 순탄하게 만들어 달라고 일여관음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기도가 계속되면서 차츰 마음이 열리게 되면
법당 안에서 일렁이고 있는 촛불도 관세음보살이요.
법당 밖에서 부는 바람도 관세음보살임을 알고 기도를 마치게 된다.
그렇게 기도를 마치면 관세음보살처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 주고
그들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일여관음은 기상을 만드는 요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 덕분에
<보문품>의 게송들 가운데서 "운뢰고체전雲雷鼓掣電 강박수대우降雹樹大雨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 응시득소산應時得消散"에 해당한다.
즉, 구름에서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면서 큰 비와 우박이 내릴지라도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힘으로 제때에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여관세음보살은 이런 힘으로 우리에게 고진감래苦盡甘來를 맛보게 하는데,
때로는 가루라신(迦樓羅身 날짐승들이 왕인 금시조)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