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 어둠속 등불

원수의 사랑(2)​

갓바위 2022. 11. 12. 09:27

원수의 사랑(2)

산으로 돌아온 장생태자는 아버지의 최후의 말에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참기 어려운 원한을 풀어야 할 것인가를 며칠을 두고 고민하였다.

여러 날을 두고 고민한 끝에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물리치고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성자(聖者)였다. 딴 나라왕에게

아낌없이 자기 나라를 맡기고 더욱이 목숨까지 주고도 후회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된다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를 타일렀다.

 

비할 데 없는 성자이다. 그런데, 초예왕은 이 성자를 죽이고서도

조금도 마음을 고쳐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이것을 용서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그것을 용서할 수가 없다.

이 포악무도한 초예왕을 하늘을 대신해서 벌 주는 것은 나의 사명이다.

나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만약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젊은 태자는 마침내 이렇게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나와서 천한 머슴으로 몸을 바꾸는

오로지 왕의 신변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넣어서 대신의 원정(園丁)이 되어 입주하는 데 성공했다.

원감(園監)은 그에게 야채의 씨를 뿌리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그 야채는 아주 훌륭하게 자랐다.

 

어느날 대신이 정원에 나와서 태자가 심은 야채를 보고

칭찬을 하면서 원감을 불러 누가 가꾸었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원감이 대답해서 말했다.

『최근에 고용한 젊은이가 가꾼 것입니다.』

 

대신은 당장에 그 젊은이를 불렀다. 그는 첫눈에 이 어린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대신은 그를 정원에 머슴으로 두기는 아깝다고 생각하고,

 

『너는 요리를 할 줄 아나?』

하고 물었다. 태자는 서슴없이,

『요리는 내가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일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밭에 나가서 괭이만을 메고 다니던 태자는 부엌에서 칼을 쥐어본

일은 없지만 손재주가 좋은 그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대신의 칭찬을 받게 되었다.

어느날 이 대신은 자기 집으로 국왕이 납시어 주시기를 아뢰었다.

 

국왕은 기꺼이 대신의 집으로 갔다.

그래서 대신은 자랑하는 요리를 내놓고 국왕을 환대했다.

요리가 너무나 맛이 있기 때문에 누가 만든 것이냐고 왕이 묻자

대신은 이러 이러한 젊은이가 만들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왕은 이 요리사가 크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어거지로

대신으로부터 태자를 물려받아 궁정의 요리사로 임명했다.

 

태자의 우아한 풍채와 준수한 기질에 완전히 반해버린 국왕은 이 소년을

자기의 시종으로 삼으려고 생각하고 어느날 장생태자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검술을 배운 일이 있는가?』

태자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네, 배운 일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왕은 태자를 자기의 시종으로 삼아 항상 옥좌(玉座)

곁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적을 가지고 있다.

지난해에 죽인 장수왕의 아들 장생태자는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

그는 나에게 아주 무서운 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 같이 힘센 젊은이가 항상 곁에 있어 주기 때문에 베개를 높이 하고 잠잘 수 있다.』

현재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이 장생태자인 줄도 모르고 그는 자기의 생명을 그에게 내맡긴 셈이었다.

『잘 알아보셨습니다. 대왕을 위해서 언제든지 목숨을 내걸고 지키겠습니다.』

 

장생태자는 목숨을 적에게 맡기고 안심하고 있는

초예왕을 불쌍하게 생각하면서도 태연하게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 하니 왕은 태자에 대한 신임은 점점 커갔다.

태자는 불쌍하게 생각하였지만 절대로 복수를 잊지 않았다.

 

그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사냥을 좋아하는가?』

태자는 주저치 않고 대담하게 말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사냥을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왕은 당장에 사냥 준비를 명령했다. 많은 부하들의 호위를 받고

훌륭한 행차를 갖춘 왕과 장생태자는 왕궁을 나섰다.

일행은 거리를 누벼 성문을 빠져나오고,

촌락을 지나 들을 가로지르니 겨우 산모퉁이에 도착하였다.

 

이미 사냥이 시작되었다.

왕과 장생태자는 도망치는 짐승을 발견하고 그것을 쫓아

점점 깊은 산중으로 빠져 들어가 마침내 방향을 잃고 말았다.

 

두 사람은 사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안고 산중을 헤매었으나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배는 고파 온다. 몸에 피로가 닥쳐온다. 기운이 빠져온다.

이젠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후퇴할 수도 없었다.

 

사흘째 되는 밤 두 사람은 숲속으로 들어가 말에서 내려서 주저 앉고 말았다.

왕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장생태자에게 맡기며,

『네 무릎을 빌려달라. 나는 여기서 잠시 쉴 터이니.』

 

하고 왕은 태자의 무릎을 베고 정신없이 잠들어 버렸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태자가 왕을 속이고 이 숲속으로 유인한 것이었다.

태자는 이런 기회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기뻐하였다.

 

<오랫동안 이 기회를 기다렸다. 이제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되었다.>

태자는 칼을 빼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왕을 찌르려고 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 아버지의 최후의 말이 번갯불처럼 번쩍거렸다.

 

숭고한 아버지의 가르침은 이 순간에 그의 힘을 무디게 하고 말았다.

그는 급히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았다.

이때 왕은 눈을 뜨고 말하기를,

 

『나는 지금 아주 불길한 꿈을 꾸었다.

장수왕의 아들이 나를 죽이러 왔기 때문에 놀래어 벌벌 떨다가 잠이 깼다.

무슨 일일까.』 장생태자는 어거지로 태연하게 말했다.

 

『이것은 이 산에 살고 있는 도깨비가 대왕에게 장난을 한 것일 겁니다.

제가 곁에 있으니 아무쪼록 안심하시고 주무십시오.』

 

황은 몹시 피로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장생태자는 다시 칼을 뽑아 죽이려 했는데 이번에는 아버지의

최후의 말이 생각나 왕을 죽이지 못하고 다시 칼을 놓았다.

 

그러자 왕은 다시 눈을 뜨고 공포로 몸을 떨면서,

『장생태자가 나를 찌르려고 하는 꿈을 꾸었다.

두 번이나 이런 꿈을 꾼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웬일일까.』

『산에 살고 있는 도깨비의 장난이 틀림 없습니다. 무서워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장생태자는 이렇게 왕을 위로했다. 왕은 또 안심하고 잠들어 버렸다.

장생태자는 이번에는 기어코 한 용기를 내어 왕의 가슴에 칼을 댔다.

이번에도 아버지의 최후의 말이 마음에 되살아 올라서 도저히 찌를 수가 없었다.

마침내 태자의 복수심은 아버지의 숭고한 마음에 지고 말았다.

 

그는 왕을 찌르는 것을 단념하고 칼을 땅에 내던지고 말았다.

그때 왕이 꿈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또 장수왕의 아들이 나를 죽이러 왔다.

그러나 그는 칼을 내던지고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꿈속에서 말했다.

이게 어찌 된 꿈일까.』

 

그래서 태자는 왕 앞에 모든 것을 자백하였다.

『임금님, 제가 바로 장수왕의 아들인 장생 태자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왕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절대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된다.

원수는 원수를 낳아 영원히 끝없이 계속되는 법이다.

 

아버지는 지금 보시를 위해서 기꺼이 죽어가는 것이다.

아무런 원한도 없다. 이 아버지를 위해서 보복을 한다면

아버지의 깨끗한 죽음을 보복의 피로 더럽혀질 것이다.

 

절대로 보복 때문에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하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이 교훈에 따르지 못하고 지금 당신을 죽이려 했습니다.

 

제발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리하여 복수심으로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을 멸망시켜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왕 앞에 몸을 내던졌다.

 

이 말을 듣자 초예왕은 마침내 깨닫고

옛날의 잘못을 뉘우쳐 태자의 손을 잡고 마음으로부터 사과했다.

 

『태자여, 지금 나를 충심으로 당신에게 사죄합니다.

나의 과거는 내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흉악 무도한 행동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성자(聖者)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참하게도 태워 죽이고 알았습니다.

 

이렇게 죽은 왕의 태자는 현재 원수의 생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으면서

아버지의 거룩한 가르침에 쫓아 나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들 부자의 하느님 같은 행동으로 완전히

딴 세상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나의 죄를 사해 주십시오.』

 

왕은 땅에 무릎을 꿇고 회오(悔悟)의 눈물을 흘리면서 충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서로 진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하게 된 두 사람에게는

고민도 원한도 한꺼번에 없어지고 말았다.

 

괴로웠던 산중의 밤은 밝아 싱그러운 새벽의 햇빛이 숲속을 헤치고 비쳐왔다.

두 사람은 풀밭 위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 손을 맞잡고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감격의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두 사람은 제 정신이 들자 숲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숲 밖에는 많은 부하들이 두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육식을 들어 겨우 기운을 차렸다.

 

왕은 장생태자를 가르치면서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 분이 누군지 알고 있는가?』

 

부하 중에는 옛날 장생태자로부터 은혜를 베풀어 받은 자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태자에게 위험이 닥칠까 두려워 모두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이 소년이야말로 장수왕의 태자 장생이다.

오늘부터 나는 옛날대로 바라나시국으로 돌아가고

코사라국을 이 장생태자에게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우리는 형제가 되어 서로 도와가며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초예왕은 일체의 일들을 여러 사람 앞에서 말했다.

이것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죽은 장수왕의 위대한 덕에 감동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초예왕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장생태자는 코사라국의 왕위를 이었다.

이 두 나라는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오랫동안 형제와 같이 지냈다고 한다.

장수왕은 지금의 석가모니이다.

장생태자는 지금의 아난(阿難)이다. 초예왕은 데바닷다이다.

 

관련 경전 : 장수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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