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상식

해은사 수로왕비의 가야 도래와 혼인담

갓바위 2024. 3. 13. 11:41

 

 

해은사 수로왕비의 가야 도래와 혼인담

수로왕비의 가야 도래와 혼인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그 과정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기록을 검토해 보면 지명과 신화, 전설, 민속학적 풍습 등 다양한

내용들이 숨어 있어, 고대 가야 건국 당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수로왕비와 김수로왕의 결혼과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금관성 파사석탑 조에서 더듬어 볼 수 있다.

​건무(建武) 24년 (기원 48년) 무신(戊申) 7월 27일에 구간 등은

수로왕에게 왕비를 얻을 것을 청하는 말을 올렸다.

 

그러자 왕은 “내가 이 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나의 배필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 말라.”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유천간(留天干)에게 빠른 배와 말을 주어서 망산도(望山島)로 가서

기다리게 하고, 또 신귀간(神鬼干)에게 명령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다.

그때 갑자기 한 척의 배가 바다의 서남쪽으로부터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배 안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육지로 내려왔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궐로 달려가서 왕에게 알리니

왕은 매우 기뻐했다. 왕은 구간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여 대궐로 모시게 했다.

그러나 배 안의 왕비는 “나는 너희들을 모르기 때문에 경솔히 따라 갈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왕은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에 가서, 장막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비도 별포(別浦) 나룻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왔다. 그리고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바쳤다. 왕비는 여러 사람들과 보화를 가지고 행궁으로

다가가니 왕은 그녀를 맞이하여 장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야에 오게 된 연유를 수로왕에게 이야기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이라고 합니다.

 

본국에 있을 때 부모님들께서 꿈에서 상제님을 보았는데 상제께서

가라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 라고 하셔서 저를 가락국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따고 떠났는데 수신의 노함으로 갈 수 없게 되어

다시 돌아가 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왕과 왕비는 두 밤 한나절을 지낸 후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내고 대궐로

돌아왔다. 이후 수로왕비는 기원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묻힐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

 

백성들은 왕비를 잊지 못하여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陵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또 가락국의 질지왕은 452년 왕과 왕비가

혼례를 치른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고려시대에도 매년 7월29일에 이 지방의 사람들은 승점에 올라가서

장막을 설치하고 술과 음식으로써 즐기고 떠들면서

동서로 눈짓을 보내 건장한 인부들을 좌우로 나누었다.

 

그리고 망산도로부터 말은 육지로 달리고 배는 북으로 옛 포구를 향해

달리게 했다. 이것은 수로왕비가 도착한 것을 왕에게 급히

알리려 했던 유천간과 귀천간의 일을 기리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