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봉사의연혁
520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됩니다.
여기에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습니다.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하였습니다.
이로써 아미타 도량이 되었습니다.
고려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358년에는 나옹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습니다.
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서서 하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었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습니다.
1802년에는 용허 석민이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51년에는 벽오 유총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78년 4월 3일에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였습니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1908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1921년 인천포교당과 봉림학교를 세웠으며,
한암을 청하여 무차선회를 여는 등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하나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입니다.
한국전쟁 때 이 절은 완전히 폐허화 되었습니다.
건봉사의 역사
건봉사의 창건은 지금으로부터 14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520년 당시 고구려 땅이었던 이곳에 아도(阿道)스님이
절을 창건하고 원각사(圓覺寺)라 하였으며,
13년 뒤인 553년에 부속암자인 보림암(普琳庵)과
반야암(般若庵)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758년(경덕왕 17)에 발징화상(發徵和尙)이 중건하고,
정신(貞信)·양순(良順)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개설한 다음부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효시가 된
이 염불만일회에는 31인의 승려와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신도 중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담당하여
염불승에게 베풀었습니다. 특히 의복을 맡은 신도는
매년 포(布) 한 단(端)씩을, 음식을 맡은 신도는
매년 백미(白米) 한 말과 깨끗한 기름 한 되씩을
헌납하였다는 기록이 <건봉사사적기>에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시물(施物) 및 공양풍습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 결과 1만일을 채운 757년(원성왕 3)에는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염불승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많은 신도들이 차례로 극락왕생하였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으로 극락왕생하옵소서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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