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 어둠속 등불

위덕관음

갓바위 2021. 4. 21. 09:29

방경일글ㆍ남종진그림

 

군사를 통솔하는일이나 군사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을 돕는다

 

당나라 태종(太宗 599~649)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의 일이다.

당 태종이 직접선발대를 이끌고 고개에서 지형을 살피고 있을 때

매복해 있던 고구려의 20만 대군이 포위 공격해 왔다.

 

당나라 군대가 포위망을 뚫기 위해 혈전을 벌이고 있는데 홀연히 하늘에서

위맹한 형상의 장군이 내려오더니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을 가리켰다.

 

태종이 보니 그 장군이 가리킨 곳은 모두 고구려군의 힘이 약한 곳이었다.

이에 태종이 군사들을 이끌고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니

 

고구려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도망가거나 항복했다. 당나라 군대는

길을 만들어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했고 고구려 군대는 크게 패했다.

 

이세민(당 태종)이 어린아이였을때 중병이 들자 아버지인 이연은

아들의 병인 낫기를 기원하는 불상을 만들어 초당사草唐寺에 봉안했다.

 

이 때 병이 낫는 경험을 했던 이세민은 나중에 초당사와 스님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시를 지었다.

당나라 무덕 원년(621)에 왕자인 이세민이 수나라 왕세충(王世充 ?~621)에게 패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소림사 무술 스님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나중에 이세민은 이 사실을 친필로 써 보내 소림사에 감사를 표시했다.

 

이런 우호적인 경험들을 가진 이세민이

불교에 해가 되는 정책을 없애버린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황제가 된 초기인 정관 2젼(828)에 당 태종은 현완玄完법사를

궁으로 초빙해 황족들과 함께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그는 644년에 조서를 내려 중앙의 5품 이상 관리들과

지방의 자사들에게 불교 경전을 하사하기도 했다.

 

또 645년 1월에 현장 스님이 많은 불경을 가지고 귀국하자

당 태종은 대대적으로 환영하라는 특별 명령을 내린다.

 

현장스님을 만난 태종은 자신의 명을 어기고 몰래 서역으로 간 죄를

용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경을 번역할 장소를 마련해 주고

경비를 지원해 주는 등 여러 가지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사정들을 감안하면 644년에 고구려 원정에 나섰을 때의 태종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관세음보살의 존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 중 위험에 처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존재가 관세음보살님이라고 말했을 것이고,

그 결과 그의 경험은 위와 같이 불교와 연결되지 않았을까?

 

중략

 

당나라의 역사책인 <구당서>에 의하면 당태종은 고연수가 이끄는

고구려 군대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항복을 받아낸다.

 

당 태종은 항복한 36,000여명 가운데 고구려군의 장교 이상 3,300명은

내륙으로 이동시키고 3만 명 정도의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풀어준다.

 

단, 고구려군 편을 들었던 3,000명 정도의 말갈인은 본보기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린다.

이른바 주필산駐蹕山전투로 불리는 이 대결은 한마디로 당의 대승이고 고구려의 대패다.

 

그런데 한민족 고유의 역사서인 <태백일사>에는 정반대로 쓰여있다.

<태백일사>중에 6번째 기록인 '고구려본기'편에도 당 태종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고연수가 이끄는 고구려 군대의 전투가 나오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보장왕 4년에 당나리의 태종이 '수나라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 정벌을 선포하더니 수십만 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크고 작은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당이 대군은 분산되었지만 황제이자

최고사령관인 당 태종이 이끄는 군대의 숫자는 아직도 20만 명 안팎이나 되었다.

 

당 태종의 대군은 안시성 싸움에서 구원군인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와 남부보살南部褥薩 고혜진高惠眞이 이끄는 15만 대군과 대결하게 되었다.

 

대로大盧 고정의高正義의 충고를 받아들이 고연수가 정면대결을 피하고

적군의 보급로를 끊는데 주력하는 지공작전을 펴자 당황한 당 태종은

성급하게 여러 차례 정면대결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주필산에서 매복에 걸려든 당 태종의 대군은 거의 고구려 군에게 포위당할 뻔 했다.

이후 연개소문의 총공격 명령을 집행하는 고구려 군사의 공격에 맞서다가

양만춘이 날린 화살에 왼눈을 맞은 당태종은 전군에 총 퇴각령을 내렸다.

 

이후 당 태종은 200리 (80킬로 미터)에 달하는 진흙길인 요택遙澤을

겨우 통과해서 귀국하는 데 성공하지만 끝까지 추격해 온 연개소문에게 항복했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서 벌어진 협상에서 당은

고구려에게 산서, 산동, 하북, 강좌 등의 지역을 양보했다.

위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대승이요 당의 대패다. 독자여러분은 '

<태백일사>의 기록과 <구당서>의 기록 가운데 어느 쪽이 옳다고 보시는가?

필자는 <태백일사>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왜냐하면 불교 측의 기록인 '위덕관음 연기설화'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주필산전투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정황상 이는

포의당한 당 태종의 군대가 겨우 살아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구당서> 의 기록에 의하면 주필산 전투는 당 태종이 포위당할 이유가 없지만

<태백일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 태종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겨우 포위망을 빠져나간다.

 

결국 불교계에서 전해오는 '위덕관음 연기설화'는

'태백일사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 원정에서 살아 돌아간 당 태종은 이후 자청해서 현장스님을

자주 만나는데, 이 만남에서 당 태종은 불교의 이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이는 포위망에서 그를 구해준 신비한 존재가 불교의 대보살인 관세음보살이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일종의 정황증거인 셈이다.

 

하지만 남종진 화백이 그린 위덕관음보살도에서는 장군의 형상이 아니라

왼손에 연꽃을 든 전형적인 관세음보살의 모슴이 등장한다.

 

이 보살도에서 특이한 점은 배경의 밤하늘에 나오는 북두칠성과 꽃으로 된 좌대이다.

남 화백의 말을 빌리면 북두칠성은 법화경 33응신 가운데 한 분인 천대장군을

상징하고 꽃으로 된 좌대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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