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교리 강좌

악취공에서 살아나기

갓바위 2024. 2. 2. 10:03

 

 

악취공에서 살아나기

속제의 실천

공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용수 보살의 《중론》에서는

공사상의 위험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공에 대해 올바로 통찰할 수 없어서 어리석은 자는 자기 자신을 해친다.

 

마치 독사를 잘못 잡거나 주문을 잘못 외듯이.' 독사를 잡을 경우

목을 쥐어야 한다. 몸통이나 꼬리를 잡으면 독사가 고개를 돌려서 손목을 문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주문을 잘못 외면 복이 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화를 당한다.

 

공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공에 대해 오해할 경우 선과 악을

분간하지 못하는 가치판단상실 상태에 빠질 뿐이다. 그 증상은 막행막식이다.

계와 율을 어기고 아무 행동이나 하고 아무 것이나 먹는다.

 

불교 유식학에서 비판하는 악취공(惡取空)이다. 그러면 이러한 악취공에

빠져서 폐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소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철저한 속제의 실천이다.

 

동아시아의 중관학인 삼론학(三論學)에서는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이제(二諦)가 공사상의 두 축이라고 말한다.

속제는 보시나 지계, 인욕이나 정진, 선정과 같은 분별적인 가르침이고

진제는 반야인 공의 가르침으로 분별을 타파하는 궁극적 진리다.

 

이러한 '두 가지 진리' 가운데 진제를 모르고 속제만 실천할 경우에는

기껏해야 하늘나라에 태어날 뿐 해탈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진제만 추구하고 속제를 무시할 경우 가치판단을 상실하여 폐인이 된다.

 

대승보살의 올바를 삶은 진제와 속제가 균형을 이루는 진속균등

(眞俗均等)의 삶이다. 보살의 실천덕목인 육바라밀에서 진속이 균등하다.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은 속제이고, 반야바라밀은 진제다.

 

속제의 보시행에 진제인 반야바라밀의 통찰이 함께하면 보시바라밀이 된다.

속제인 지계행에 진제인 반야바라밀의 통찰이 함께하면 지계바라밀이 된다.

 

《금강경》에서 가르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에서는 '무주상'은

진제이고, '보시'는 속제다. 육조 혜능 조사의 《법보단경》에서

말하는 '무상계(無相戒)'에서 '무상'은 진제이고 '계'는 속제다.

진제를 추구하지만 이는 좌복에 앉아서 수행할 때뿐이다.

좌복에서 일어나 세속에서 살아갈 때에는 철저하게 분별을 낸다.

진제를 수행한 다음에 일어나는 분별을 보다 슬기롭고 보다 이타적이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묘관찰지의 분별이다.

맹자가 가르친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 ·의 사단(四端)

가운데 지(智)의 발현인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분별이다.

 

진속균등이 지침에 무지하여 진제만 추구하다가 가치판단 상실에 빠진

예는 불교 내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현대의 해체주의는 공사상과 통한다.

 

그래서인지 우리 주변의 일부 문학인, 예술가 등에게서도 막행막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의 무애행(無碍行)이 창작을 위한 자유의 날갯짓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서 남에게 감명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마치 독특한 성격의 거미가 아름다운 거미줄을 지어내듯이. 그러나 해체가

실천의 지침이 될 경우 자신의 인격은 파탄하고 생활은 도탄에 빠진다.

진제만 추구하다가 악취공에 빠졌을 때,

소생하는 방법은 속제의 실천에 몰입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분별을 하면서 남에게 베풀고, 선과 악의 기준인 계와 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고결하게 살아가며, 결코 화를 내지 않는 인욕의

삶을 살고 항상 정진하며, 틈날 때마다 좌복 위에 앉아서 선정을 닦는다.

 

그때 '진속균등'의 삶이 서서히 회복된다.

속제를 실천하고 분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악취공, 공병(空病)의 치료제다.

김성철 교수의 불교하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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