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교리 강좌

어린아이의 마음은 수행자를 닮았다

갓바위 2024. 2. 8. 12:03

 

 

어린아이의 마음은 수행자를 닮았다

불전에서는 생 명체가 살아가는 윤회의 현장으로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를

말한다. 이 가운데 욕계나 무색계가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다

욕계는 남녀나 암수와 같은 성(Sex)이 있는 곳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나 짐승,

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성(性)을 갖는 천신인 육욕천(六欲天)이나

아귀, 지옥중생이 사는 곳이다.

 

무색계의 경우 육체와 같은 물질〔色〕이 없기에〔無〕공간적 위치를 갖지않는다

요가 수행자 개개인이 체득하는 '삼매의 경지'로 그 깊이에 따라서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네 가지로 구분된다.

 

공무변처란 '객관대상인 허공'이 무한히 펼쳐진 삼매이고, 식무변처는

'주관인 인식'이 무한히 펼쳐진 삼매이며, 무소유처는 객관과 주관이

모두 끊어져서 아무것도 없는 삼매이고, 비상비비상처는 그렇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想〕'조차도 없어졌지만〔非〕, 그렇다고해서 생각〔想〕이

아예 없는〔非〕 것은 아닌〔非〕 삼매라고 한다.

 

윤회의 탈출구는 색계에 있다고 한다.

(물론 교학적으로 정밀하게 말하면, 색계 초선(初禪)의 경지에 도달하기

직전인 미지정(未至定)의 경지에만 올라도 무루지(無漏智)를 발생시킬 수

있어서 비상비비상처의 번뇌까지 삼계 전체의 번뇌를 끊을 수 있다.)

 

계를 완성하였기에 욕계의 번뇌가 모두 끊어졌고, 정혜쌍수가 가능하여

연기(緣起)와 공성(空性)을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색계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는 어떤 분일까?

 

불전에 의하면 욕탐과 분노〔瞋〕가 없는 곳이 색계이기에 성욕이나 식욕과

같은 동물적인 욕망도 모두 끊고, 어떤 일에도 화가나지 않아야

그마음이 색계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색계는 '집중〔止, 定〕과 관찰〔觀,慧〕이 균등한 선(禪)의 경지'이기에

색계4선의 어느 단계에 오른 수행자라면 항상

'곰곰이〔止〕 생각할〔觀〕'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에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서 색계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의 모습을 볼수있다.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이성(異性)에 대한 동물적 욕망이 있을 리가 없다.

'엄마에게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아기 목구멍으로 밥 넘어가는 소리'라고

하듯이 서너 살 된 애기에게 밥 먹이기는 참으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서 성욕이나 식욕이 적다. 또 '욕망과 분노를

억누르며 살아가는 어른'과 달리 아이들에게는 잡념이 없다.

항상 자기가 하는 일에 집중하며 주변의 모든 것들을 골똘히 바라본다.

 

'곰곰이〔止〕 생각하는〔觀〕' 선(禪) 수행과 다를 게 없다.

아이들은 언제나 '사마타의 지(止) 수행과 '위빠사나의 관(觀) 수행'을

겸수(兼修)하면서 살아간다. 물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지 않은

아이들, 정상적으로 성장한 아이들의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성욕이나 식욕과 같은 감성적 욕구가 강하지 않기에, 그런 욕구로 인한

마음의 흔들림이 없어서〔戒〕, 항상 자기가 하는 일을 집중하면서

바라볼〔定慧〕수 있는 어린아이들의 삶은 '계 · 정 · 혜 삼학의 수행'과

다를 게 없다. 색계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의 모습, 천진불(天眞佛)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아이들의 행 · 주 · 좌 ·와는 모두 선(禪)이다.

3천 배, 장좌불와, 돈오돈수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철 스님

(性徹, 1912~1993)께서는 특히 아이들을 좋아하셨다고 한다.

 

천진불과 같은 아이들의 마음이, '지계청정하게 살면서 화두를

골똘히 참구하는 선승(禪僧)의 마음', '계 · 정 · 혜 삼학을 닦는

선승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성철 교수의 불교하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