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교리 강좌

선(禪)과 교(敎), 승(僧)과 속(俗) 그리고 유발 교학자

갓바위 2024. 3. 8. 10:20

 

 

선(禪)과 교(敎), 승(僧)과 속(俗) 그리고 유발 교학자

아직 가보지 못한 어느 장소에 가려고 할 때, 가장 힘을 덜 들이고 그곳에 갈 수

잇는 방법은 이미 그곳에 갔다 온 사람의 조언을 받으며 그곳으로 가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런 조언을 받을 수 없는 경우 우리는 과거의 여행담들을

토대로 지도를 만든 후 그곳을 향해 출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불교 수행에 비교하면 '그곳에 갔다 온 사람'은 '훌륭한 선지식'을 의미하고

'여행담을 토대로 지도를 만드는 작업'은 '교학'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선지식과 인연이 닿아 그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만 있다면,

어설픈 교학은 수행자들에게 오히려 번거로운 방해물이 될 것이다.

 

큰스님들께서 당신 문하의 수행자들에게 "경전을 보지 말라."고 훈계하신

까닭이 이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교학만이 수행을 위한 지침이 된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독각불과 같이

그 어떤 경전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생사에 대한 의심만 가지고 불철주야 정진

하면 무사독오(無師獨悟) 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지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본생담》에서 보듯이 무량겁에 걸쳐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하는 보살로서의

삶이 누적되었어야 비로소 현생에 무사독오의 모습을 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사에 대한 의심은 불교인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무엇일까?"

"삶은 무엇일가?"

"나는 누구일까?"

 

이 모든 의심들은 비단 불교인만이 아니라 역사 이래 모든 철학자와

종교인들이 품었던 의심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불교는 도출되지 않았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인도 땅에서는 수많은 종교인들이

그와 같은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가부좌 틀고 앉아 명상해왔다.

 

수행의 문화가 없는 서구에서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와 같은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 불교의 진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비근한 예로《나는 누구일까》라는 책으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도의 수행자

라마나 마하라쉬가 도달한 경지는 불교가 아니라 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일 뿐이다.

 

라마나 마하라쉬는 상까라적인 베단따 사상을 추구하는 아뜨만론에 대해

부처님께서 무아의 교설을 통해 통렬하게 비판하셨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이 발견한 아뜨만은 궁극적 경지가 아니라 단지 식(識)의 흐름일 뿐이다.

유식학적 표현을 빌면 아뢰야식의 견분(見分)일 뿐이다.

 

단순히 삶과 죽음에 대한 의심만 가지고 수행을 하는 것은 지도(地圖)없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 경우 요행히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또 애초에 지향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장소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자신이 목적했던 곳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치 콜럼버스가

자신이 발견한 신대륙을 인도 땅이라고 오해한 채 삶을 마감했듯이·····

 

따라서 올바를 선지식과의 인연이 닿지 않은 사람이 수행하는 경우 방황하지

않고 손쉽게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여행자가 참조하는 지도와 같은

역활을 하는 교학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교학이란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수많은 선지식들에 의해 만들어진 수행의 지도이며 그런 교학의 지도가

남아 있기에 수행자들은 깨달음에 이르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수억 겁에서 수십 년으로 단축할 수 있는 것이다.

 

교학자는 부처님과 선지식께서 남기신 수행의 지도를 복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불교학의 많은 업적들이 유발(有髮)

교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직접 여행을 해 보지 못한 곳이라고 하더라도

선인(線人)들의 여행기를 토대로 그곳으로 가는 지도를 만들 수 있듯이,

 

깨달음의 체험이 없는 유발 교학자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언어로 전승되는

불전의 내용들을 면밀히 비교 분석해 봄으로써 깨달음으로 가는 정확한

지도를 복원할 수가 있으며, 혹 잘못된 지도가 유포되어 있는

경우에는 비판적 조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발 교학자는 출가 수행자가 아니기에 귀의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계체(戒體)가 없기 때문이다. 유발 교학자와 출가한 스님 간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계체의 유무에 있다. 스님에게는 수계식 때

형성된 계체가 그 마음속에 각인이 되어 있다.

 

불교 전문 용어로 표현하면 십이처(十二處) 중 법처(法處)에 소속된

율의무표색(律儀無表色)인 계체의 유무가 유발 교학자와

스님의 신분을 가르는 기준이된다 그리고 스님을 복전이게 하고 재가신자로

하여금 공경하게 만드는 것은 그 위의가 아니라 바로 계체인 것이다.

 

계체란 쉽게 표현하면 '계율을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계를 지키겠다는 다짐은 평소에는 출가 수행자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어떤 경계와 마주쳐 법계와 지계의 갈림길에 섰을 때 지계행으로서 표출된다.

 

아직 불교 공부가 일천한 스님이라고 하더라도 지계 청정한 스님에게

재가 신자는 공경의 모습을 나타내며 귀의하게 되는 것이다.

계행에 대한 공경심은 우리 인간의 종교적 본능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신봉되는 대승불교는 보살의 삶을 지향하는

불교이기에 삼보 중 승보도 승속의 구분이 없는 보살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대승과 보살 사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단견이다.

물론 보살의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대승불교의 승과 속은 평등하다.

 

그러나 이는 승가에 대한 진제(眞諦)적 조망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남기신 진리〔諦〕의 말씀을 접할 경우 우리는 진제와 속제의

이제(二諦) 중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속제를 무시하면 가치판단이 상실되어 악취공(惡取空)의 나락에

빠지게 되고 진제를 무시하면 영원히 해탈할 수 없다.

진제적 견지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차이가 없으며, 윤회가 그대로 열반이요,

 

행주좌와가 모두 선(禪)이며,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불가득(不可得)이고,

계율도 공(空)하다는 무차별적 선언이 가능하다. 그러나 속제적 견지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고, 윤회는 결코 열반이 아니며, 가부좌 틀고 좌선해야 하며,

 

과거, 현재, 미래가 엄연히 존재하며, 계상(戒相) 역시 실재한다.

따라서 승과 속이 보살로서 평등하다는 것은 진제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조망일 뿐이며 속제의 차원에서는 출가와 재가, 즉 승과 속이 엄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승보에 대한 귀의는 속제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행위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제2의 불교 도입기를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 도입될 당시 수많은 역경승에 의해 불전의 한역 작업이

이루어졌듯이,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소장(小壯) 교학자들에 의해 산스끄리뜨와

빠알리, 도 한역 불전들의 국역 작업이 정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주제의 논문들이 양산되고 있다.

 

계체가 없기에 공경의 대상은 아니지만, 불교에 대한 열정으로 청춘을

불사르고 불교 고전어에 대한 독해력을 갖추어 수행을 위한 새로운 지도를

소개할 수 있으며, 객관적 분석을 통해 엄밀한 지도를 제작할 수 있는

장인(匠人)이 유발 교학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들이 생계를

유지하며 활동할 터전이 너무 좁다. 유발 교학자는 이 시대의 비구〔乞士〕인가?

김성철 교수의 불교하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