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교리 강좌

깨닫기 전과 후

갓바위 2024. 3. 18. 11:26

 

 

깨닫기 전과 후

 三日修心 千載寶 (삼일수심 천재보)

소년은 15살 이었습니다. 하루는 마을 근처에 있는 절에 놀러 갔습니다.

​거기서 동자승을 만났습니다. 동자승은 그에게 명구(名句) 하나를 읊었습니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다.”

​뜻을 풀면 이렇습니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 탐한 재물은 하루 아침의 티끌이다.

​소년은 상당히 조숙했었나 봅니다. 그는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고,

큰 감동도 받았으며, 자신이 갈 길이 바로 이 길임을 직감했습니다.

 

​소년은 그길로 몰래 집을 나와 출가를 하는데, 15살 소년의 자발적 출가였습니다. ​

그소년이 누구냐고요? 불교계에서 강백(講伯)으로 이름이높은 무비(無比) 스님입니다.

15살 소년은 이제 79살의 노승이 되었지요.잠시 카톨릭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예전에 카톨릭에서 주관한 '죽음체험 피정'을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줄지어 선 참석자들은 자기 차례가 되자 관 속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잠시 후 관 뚜껑이 닫히고 그 속에서 5분 가량 있다가 다시 나왔습니다.

 

그런데 관에서 나온 사람마다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그걸 쭉 지켜보던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저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저들은 왜 눈물을 흘리는 걸까?

 

​저는 취재수첩과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줄을 섰지요. 제 차례가 왔고,

저도 관 속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곧이어 관 뚜껑이 닫혔습니다

​관 뚜껑과 관, 그 사이로 실처럼 가느다란 빛이 들어왔기에 아주 캄캄한

어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관 뚜껑 위로 천이 덮였습니다.

그러자 빛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어둠 속에 제가 누워 있었습니다.

​'아~, 여기가 무덤이구나!'

​공간은 철저하게 분리돼 있었고, 관 속과 관 바깥은 달라도 아주 달랐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관 바깥 세상에 있는 어떠한 것도 이 안으로

가지고 올 수가 없구나.” ​관 바깥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요.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내가 하는 일, 내가 늘 보고 읽는 책, 내가 아끼는

이런저런 물건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물건도 관 속으로 가지고

어올 순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남는 걸까?

관 속에 누워있는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이 물음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그때 비로소 알겠더군요.

“​​아! 마음이구나. 죽어서 관 속에 누운 나에게 남는 것은 마음이고,

이 관 속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것도 마음 뿐이구나!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거지? 잘 살아야지, 마음을 잘 가꾸며 살아야지.”

​무비 스님의 출가담을 들으면서, 저는 관 속에 누웠던

'죽음체험 피정'이 떠올라서 몇 자 올려 봤습니다.

​사흘 닦은 마음이 천년의 보배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구절에 무척 공감이 갔습니다. 왜냐고요?

 

죽은 뒤에 내가 가져가는 건 마음 뿐이라는 걸 절감했으니까요.

​아무리 빛나는 보석과 좋은 자동차도, 좋은 집도 가지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오직 하나 나의 마음만 가지고 갈 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비 스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불교는 마음 닦는 종교, 즉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깨닫기 前과 깨달은 後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무비 스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달라지는 건 없다. 다만 인간의 삶에서 맛봐야 하는 굉장한 기쁨,

엄청난 절망, 잊지 못할 고통 앞에서는 그 차이가 확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지는지 다시 여쭈었습니다.

“​​도인일수록 폼 잡지 않는다. 정말 명경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의 마음을 가진 도인은 더 인간적이다.​

 

더 슬퍼하고, 더 기뻐하지만, 그 슬픔과 기쁨에 젖지 않을 뿐이고,

기뻐하되 기쁨에 물들지 않고, 절망하되 절망에 물들지 않는다.

​물론 불의를 보면 분노한다. 그런데 그 분노에 물들지 않는다.

 

​그러면 어찌 되겠나.

슬픔과 고통과 절망 속에 있어도 '나[我]'가 상(傷)하는 일이 없다.”

​​'그런 삶은 어떤 삶일까?'를 다시 여쭈었습니다.

 

​가뿐한 삶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살기가 아주 수월한 삶이 되며,

삶도 가뿐하고 죽음까지도 가뿐하게 느껴진다고 하셨습니다.

​생사 해탈이 대단한 것이 아니며, 그게 바로 생사 해탈이라고 하셨습니다.

“​​삶이 뭔가?

​인연따라 세상에 관광 왔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면 당연히 돌아가는 것이다.”

​무비 스님은 자신이 입적할 때 다비식도 않겠다고 했습니다.

괜히 산 사람들 번거롭게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몸은 그동안 입었던 옷이니

그냥 벗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미 시신기증 서약까지 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비 스님에게 '가뿐한 삶', '물들지 않는 삶'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무비 스님은 바둑에 빗대서 答을 내려주셨습니다.

“​​​하수들이 바둑을 둘 때 고수의 눈에는 다 보인다.

어디에 두면 죽고, 어디에 두면 사는지 말이다.”

​곧 죽을 자리인데도 돌을 놓는 것이 빤히 보인다는 말씀이시다.

​사람들은 자기 바둑을 둘 때는 수를 놓칠 때가 많지만,

반면에 남의 바둑에 훈수를 둘 때는 수가 잘 보인다.

 

훈수 둘 때는 2급 이상 바둑 실력이 더 높아진다고 하지 않던가.

​왜 그렇겠나. 바둑에 '나(我)'가 없기 때문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에 '我'가 없으면 지혜가 생기고, 그래서 인생에서도 고수(高手)가 되는 것이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라고 했는데, 무비 스님은 그런 마음을

어떤 식으로 닦아야 하는지 중요한 힌트를 주셨습니다.

​남의 바둑에 훈수 두듯이, 한 발 뚝 떨어져서 나의 바둑을 바라보는 여유와

거기서 나오는 지혜로 나의 바둑을 풀어가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발짝 또 한 발짝 가다 보면 우리의 삶도 가뿐해지고,

수월해질 것이며, 물들지 않는 삶이 되지 않을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말입니다.

- 중앙일보 백성호 종교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