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 어둠속 등불 1391

해은사 해일을 없앤 원력

해은사 해일을 없앤 원력 부처님의 뜻에 근거한 원력은 한없이 큰 것이다. 하늘의 혜택을 골고루 갖춘 가락국 영토의 중심부인 김해에는 금벌의 옥토를 자랑하며, 한편으로는 옛날부터 백제와 신라가 탐을 내어 끊임없이 병합하려 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부지런하였으며 사계절에 따른 자연의 산물은 넉넉하여 쉴새 없이 사람들은 살기 좋은 가락 지역으로 모여 들었던 것이다. 반도 남단이면서 태평양의 거센 파도의 직접적인 피해를 면할 수 있었으며 서북풍이 몰아치는 겨울절기에는 모진 찬 기운과 눈보라의 동해로부터 보호된 지역들이었다. 그러나, 연중 두 세 번의 계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이 땅의 기후조건으로 하여 폭풍이 몰아치거나, 폭우가 쏟아지는 시기에는 어김없이 김해 지역은 낙동강의 내륙으로 흘러드는 강물과 넘..

기사회생

아내의 기사회생과 관음기도 ​ 일제시대 평양에 살았던 유제규(劉濟奎)거사는 평양교당(平壤敎堂)에 다니다가 젊은 법사인 정지월(鄭指月)스님으로부터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문득 신심이 샘솟는 것을 느낀 유제규는 보문품을 배껴 부부가 날마다 보문품을 독송하였습니다. ​ 그렇게 매일 보문품을 외우기를 몇 달, 1928년 12월 18일 밤의 일이었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그날, 가족끼리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9시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유제규 거사는 매일의 일과대로 보문품을 세번 독송하고, '관세음보살' 3천념(三千念)을 한 다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약 30분정도 숙면을 취하였을까? 비몽사몽간에 흰옷 입은 노부인(老夫人)이 나타나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정신..

해은사 수로왕비의 가야 도래와 혼인담

해은사 수로왕비의 가야 도래와 혼인담 수로왕비의 가야 도래와 혼인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그 과정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기록을 검토해 보면 지명과 신화, 전설, 민속학적 풍습 등 다양한 내용들이 숨어 있어, 고대 가야 건국 당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수로왕비와 김수로왕의 결혼과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금관성 파사석탑 조에서 더듬어 볼 수 있다. 건무(建武) 24년 (기원 48년) 무신(戊申) 7월 27일에 구간 등은 수로왕에게 왕비를 얻을 것을 청하는 말을 올렸다. 그러자 왕은 “내가 이 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나의 배필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 말라.”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유천간(留天干)에게 빠른 배와 말을 주어서 망산도(望山島)로 가서 기다..

통도사의 창건설화

통도사의 창건설화 신라 때 자장율사는 당나라에 건너가 수도를 하고 부처의 숭고한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 부처의 가사와 사리를 받들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로 하고 문수보살께 절을 세우기에 적당한 곳을 물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밤 꿈에 훌륭하게 차려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부처님 모실 곳을 일러주었다. "동국에 부처를 모시도록 하라.” 자장율사는 동국이 신라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나 넓은 신라의 어느 곳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동쪽으로 날려 보냈더니 얼마 후 오리는 한 송이 칡꽃을 물고 돌아왔다. 자장율사는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것이 부처님의 뜻임을 깨닫고 흰눈이 쌓여 있는 한 겨울에 칡꽃을 찾아 나섰다. 며칠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

통도사의 사리탑

통도사의 사리탑 신라 때 자장율사는 양산 통도사에다 부처님사리를 받들어 모시고 뚜껑을 돌로 만들어 덮었다. 그런 뒤 어느 날 조정에서 사자를 보내어 이 절에 참례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사자는 유명한 사리를 친히 보고자 스님들에게 명하여 돌뚜껑을 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속을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커다란 두꺼비가 앉아 눈알을 번득이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그 뚜껑에는 ‘훗날 아무개 성을 가진 사람이 이것을 열 것’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 사자의 성과 일치했다고 한다. 이 사리탑의 동쪽 돌에는 얼룩얼룩한 빛이 나타나 있는데, 이는 고려 광종 4년 경주 황룡사 구층탑이 세 번째 화재를 당하였을 때라고 한다.

통도사 스님을 사모한 처녀

통도사 스님을 사모한 처녀 언제인지 분명치 않지만 통도사에서 가장 높은 산내암자 백운암에 홍안의 젊은 스님이 홀로 경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장차 훌륭한 강백이 되기를 서원한 이 스님은 아침저녁 예불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기원하면서 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직 산기슭 군데군데에 잔설이 남아 있던 어느 봄날, 스님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저녁 예불을 마치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경을 읽고 있었다. 문든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아리따운 아가씨의 음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스님, 계십니까?” “뉘신지요?” 문을 연 스님은 이번엔 귀가 아니라 눈을 의심했다.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처녀가 바구니를 든 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늦은 시각, 이렇게 깊은 산중에 웬일이십니까?” “소녀, 친구들과 나물..

통도사 자장율사와 금개구리

통도사 자장율사와 금개구리 통도사의 산내암자인 자장암에는 법당 뒤 절벽 바위에 1천400년 전부터 금개구리가 살고 있다고 전한다. 요즘도 자장암에서 정성들여 기도를 잘하면 볼 수 있다는 이 금개구리는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세우기 전, 석벽 아래 움집을 짓고 수도하고 있을 때 나타났다고 한다. 어느 날 저녁 자장율사는 공양미를 씻으러 암벽 아래 석간수가 흘러나오는 옹달샘으로 나갔다. 바가지로 막 샘물을 뜨려던 스님은 잠시 손을 멈췄다. “웬 이럴 수가. 아니 그래 어디 가서 못 놀아서 하필이면 부처님 계신 절집 샘물을 흐려놓는고.” 스님은 샘에서 흙탕물을 일으키며 놀고 있는 개구리 한 쌍을 두 손으로 건져 근처 숲속으로 옮겨 놓았다. 다음날 아침. 샘가로 나간 자장스님은 개구리 두 마리가 다시 와서 놀고 있..

통도사 구룡지 용혈암

통도사 구룡지 용혈암 통도사 대웅전 뒤에 있는 연못이 바로 구룡지이며, 용혈암은 통도사 입구 무풍교 근처에 있다. 옛날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본국으로 돌아와 통도사를 지으려고 하던 즈음이었다. 그 당시는 통도사 터는 큰 연못이었는데, 이 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스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주문과 경을 읽으며 아홉 마리의 용에게 조용히 이 못을 떠나달라고 청하였으나 용들이 일절 응하지 않자, 법력으로 아홉 마리의 용과 결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견디지 못한 용들은 제각기 앞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세 마리의 용은 달아나다가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떨어져 죽었다. 당시 부딪힌 바위에 용의 피가 낭자하게 묻게 되어서 후세사람들이 이 바위를 용혈암(龍血巖)이라고 부르게..

청곡사의 잘린기둥

청곡사의 잘린기둥 대웅전 왼편의 선불장에는 잘려진 기둥이 있는데 이것에 전설이 있다고 한다. 19세말 청곡사가 빈 절 이었을때 진주 부자 강 아무개가 절간 기둥이 탐이 나 잘라서 제 집을 짓는데 사용했다. 이에 크게 노한 지장보살은 얼마 안가 만석지기인 강 아무개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게 하고 집안을 망하게 했다고 한다. 불법을 잊고 있는 탐욕스런 사람들을 위해 일침을 주는 전설로 청곡사에 가면 이 글귀를 찾을 수 있다.

청곡사 창건설화

청곡사 창건설화 『이 사찰의 창건에 관련된 다음의 전설이 전해온다. 도선국사가 어느날 진주 남강변에 앉아있는데 문득 청학 한 마리가 강위로 날아들더니 곧장 월아산 기슭으로 날아가 앉았더란다. 청학이 날아가 않은 곳에 상서로운 기운이 충만한 것을 보고 당나라에서 전수받은 비보설에 따라 이곳에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이 전설을 뒷받침하듯 청곡사 입구에 학을 불러들인다는 환학루(喚鶴樓)가 세워서져 있고 환학루 창건기, 나한전 중수기, 퇴계의 시가 목판에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