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 어둠속 등불 1391

미타암 미타굴과 아미타불에 관한 설화

미타암 미타굴과 아미타불에 관한 설화 천성산 중턱의 기암절벽에 있는 미타굴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성행했던 미타신앙의 흔적을 전해주는 포천산 다섯 비구의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다섯 명의 비구승이 이곳에서 아미타불을 염하며 수도하던 끝에 성불을 이루고 서방정토로 날아갔다는 이 이야기는 신라불교의 사상적 근원의 한 관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삼국유사』「포천산 오비구」조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삽량주(揷良州, 현재의 양산) 동북쪽 20리 가량 되는 곳에 포천산(佈川山, 현재의 천성산)이 있다. 바위동굴이 기이하여 완연히 사람이 깎아 만든 듯하고, 이곳에 다섯 비구가 있는데 그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아미타불을 염하고 정토를 구한 지 몇십 년만에 홀연히 성중(聖衆)이 서쪽에서 와 그들..

만어사 너덜경의 유래

만어사 너덜경의 유래 만어사는 규모는 작으나 신라 선덕왕 때 건립된 고찰이다. 만어사가 위치하고 있는 만어산의 너덜경이라는 곳은 경치가 매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좋은 돌이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이 너덜경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옛날 중국의 진시황은 아방궁을 짓고 천하의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거두어들여 녹인 다음, 이것으로 사람의 모양을 크게 만들어 아방궁 근처에 띄엄띄엄 세워놓았다. 쇠붙이를 모두 거두어들인 것은 사람들이 쇠로 무기를 만들어 자신의 나라를 침범치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진시황은 그렇게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번에는 천하의 돌을 전부 날라다가 만리장성을 쌓기로 했다. 당시 풍월가를 잘 읽고 귀신을 어르는 재주가 있는 마고할미가 있었다. 마고할미도 만리장성을 쌓는 데 돌..

만어사 고기떼가 변해 돌이된 만어

만어사 고기떼가 변해 돌이된 만어 ①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편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 의하면, 지금의 양산지역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사악한 독룡 한 마리와 사람을 잡아먹는 다섯 나찰(羅刹)이 서로 사귀면서, 농민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치는 등 온갖 행패를 일삼았다고 한다. 이에 가락국 수로왕이 주술로 그들의 악행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님께 설법을 청해 이들로부터 오계(五戒)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는데, 대부분 경쇠소리를 내는 신비로운 돌이라는 것이다. ②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의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부..

내원사 1천명의 성인을 이룬 천성산

양산의 천성산(千聖山) 일대의 사찰들은 대체로 같은 창건설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 까닭은 송(宋)의 찬영(贊寧, 919~1002)이 저술한 『송고승전(宋高僧傳)』의 내용에서 절의 시초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원효스님이 태화사(太和寺)의 대중을 구한 일화와 내원사 창건설화가 전한다. 기장의 담운사(淡雲寺:擲板庵)에 주석하고 있던 원효스님은 어느 날 중국 태화사에 산사태가 나 공부하던 스님들이 매몰될 것을 예견하였다. 그래서 판자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는데, 이 판자는 태화사까지 날아가 마당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자 이를 보고 법당 등에서 수도하던 많은 대중들이 놀라 모두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때 갑자기 산사태가 나서 법당 등의 건물들이 묻혀버렸다. 놀란 대중들이 땅에 떨어진 판자를 보니..

용주사 정조대왕의 효심

용주사 정조대왕의 효심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번 못하다니……" 왕세손이었던 정조 나이 11세 때, 할아버지 영조는 부친 장현세자 (장조, 사도세자)에게 비참한 죽음을 내렸다. 뒤주에 못을 박고 큰 돌을 얹게 한 후 손수 붓을 들어 세자를 폐하고 서인을 만들어 죽음을 내린다는 교서를 발표한 것이다. 그로부터 8일 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임금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부모님의 은혜를 10가지로 나누지요. 그 첫째는 나를 잉태하여 보호해 주시는 은혜요, 둘째는 고통을 참고 나를..

심복사 창건설화

심복사 창건설화 옛날 파주 문산포에 천문을(千文乙)이라는 어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이곳 덕목리 앞 아산만에 이르게 되었다. 고기잡이에 열중하고 있던 중 그물에 무엇인가 걸렸다. 그물을 당겨보니 큰 돌이었다.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다시 바다에 그물을 던졌다. 얼마 후 그물에는 또 무엇인가 걸린 듯하였다. 건져보니 이번에도 돌이었다. 이상히 여겨 살펴보니 그것은 불상이었다. 깊은 불심을 지니고 있었던 어부는 부처님 앞에 여러 차례 절을 올렸다.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어디든지 모셔야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절터를 찾아 근처 고등산으로 향하였다. 이상하게도 등에 지고 있는 부처가 새털같이 가볍게 느껴졌다. 얼마쯤을 왔을까. 그렇게 가볍게 느껴지던 부처가 갑자기 무거워지..

수종사 창건설화

수종사 창건설화 수종사는 세조(世祖)와의 깊은 관련을 빼고서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절의 설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세조가 만년에 병을 치료하고자 강원도 오대산에 갔다 돌아올 때였다. 뱃길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도중에 밤이 되었으므로 이곳 양수리에서 물 위의 야경을 즐기고 있었는데, 이 때 옆에 있는 운길산에서 때 아닌 종소리가 들렸다. 세조는 신하를 보내 숲 속을 조사해 보도록 하니 천년 고찰의 폐허가 있었고, 바위 벽에는 16나한상이 줄지어 앉아 있는데 그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들은 세조는 매우 감동했고, 마침내는 발심하게 되어 지금의 이 자리에 절을 복원케 하고 절 이름을 수종사라 하도록 했다.

석남사 미양고지

석남사 미양고지 옛부터 풍수지리설은 사람의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움직이게 한다. 특히 내가 잘되면 그만이지만 천에 한번이라고 일이 잘못되면 조상의 탓이라고 원망을 하고 조상 묘지를 옮기며 그 자리는 좋지가 않다는 등 말이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욕심이며 현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사리 판단이 어렵게 되면 남의 말과 풍문을 잘 듣게 되어 나중에는 도가 지나쳐 패가 망신을 하는가 하면 아까운 목숨마져도 초개와 같이 잃게되는 수가 비일비재하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야기 역시 엉뚱한 풍수지리설을 믿고 전설의 주인공이 된 고몽룡(高夢龍)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다.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의 일이었다. 경기도 안성군 미양땅 심촌(沈村)이라고 하는 동리에 고몽룡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석남사 안성군수 김위

때는 조선조 9대 숙종때의 일이다. 경상도 안동땅에 김위(金瑋)라고 하는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어느해 가을비가 여러번 치른 과거(科擧)였지만 실망하지 않고 항양을 향해 올라 가다가 경기도 안성(安城)땅에 다달아 날이 저물게 되었다. 큰 길에서 얼마쯤 떨어진 곳에 내(川)가 한 있고 내를 건너면 20여호나 되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 뒤에는 높은 산이 솟아있고 마을 옆쪽으로 나무가 우거진 곳에 큰 기와집 한 채가 눈에 띄었다. 김위는 그 기와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대문에 당도하여 "이리 오너라" 하고 불러 보았으나 인기척이 없고 몇번 소리를 치자 그제서야 노인이 문을 부시시 열고 나왔다. 지나가는 과객인데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재워 줄것을 간청하니 노인은 선뜻 친절한 기색으로 김위를 맞..

청계사 만경대설화

청계사 만경대설화 관악산은 진산(鎭山)이고 청계산은 청룡산(靑龍山)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옛날에는 비가 오려고 하면 진산과 청룡산이 함께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에 천지개벽을 할 때 배를 타고 다니며 돌을 주어 망경대를 만들었는데, 관악산 꼭대기인 영주대(연주대)에 배를 대고 돌을 모았다고 한다. 큰 비가 와서 홍수가 났는데, 관악산 꼭대기만 빼고는 모두 물에 잠겼으므로 배를 탔다는 것이다. 청계산 정상의 이름은 이 때 여러 경치를 주워 모아서 만들었다고 하여 만경대(萬景臺)라고 불렀던 것이라고 한다. 이성계가 왕씨를 치고 조선을 건국한 후 "충신은 불사이군이다,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하여 조준의 동생 조견이 청계산으로 은거했다. 조견은 당시의 실력가로 꼭 회유해야 민심을 수습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