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 어둠속 등불 1391

장유사 장유화상의 설화

장유사 장유화상의 설화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장유화상의 행적이 설화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장유화상(長遊和尙)은 허왕후의 오빠로 보옥선인(寶玉仙人)이라고도 하며 수로왕의 7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으며 지리산에 들어가 7왕자를 성불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지리산 반야봉 칠불사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왕후는 모두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그 중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셋째는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장유화상을 따라 가야산에 들어가 3년간 불법을 수도했다. 왕후가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왕후는 다시 지..

율곡사의 전설

율곡사의 전설 율곡사 대웅전을 중건 할 때인데 하루는 대목수 한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가 맡아서 짓겠다고 하였다. 절에서는 마침 목수를 찾고 있는 중이어서 몇 가지 물어보고 곧 일을 맡기게 되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 목수가 하는 일이라고는 매일 목침(木枕)만 다듬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기다린 것이 석 달이 되어도 목침 다듬는 일만 하고 있기에 답답한 스님이 목수 몰래 다듬어 놓은 목침 한 개를 감추어 버렸다.그랬더니 며칠 뒤에 느닷없이 목수가 연장을 챙겨서 공사를 중단하고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주지가 그 연유를 묻자, 다듬어 놓은 목침이 모자라니, 이러한 정신으로는 이 큰 불사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떠나는 것이었다. 급한 김에 절이 발칵 뒤집혔는데 그 때 목침을 감추어 둔 스님..

원효사 부어도 부어도 차지 않은 바랑

원효사 부어도 부어도 차지 않은 바랑 원효스님이 중국에서 온 1천명의 제자와 함께 원적산 내원암에 자리를 잡은 뒤였다. 그런데 워낙 많은 대중이라 식량이 부족하여 지금의 상북면 대석리 ‘모래불’이라는 동네에 거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원효스님은 쌀 한 되 가량 들어갈 수 있는 바랑을 가지고 시주를 구하러 갔다. 하인이 쌀 한 되를 가지고 나와 바랑에 부으니 반도 차지 않았다. 이상히 생각한 하인은 또 한 되를 넣고 이를 거듭하여도 여전히 차지 않아, 너무도 이상한 사실을 주인에게 고하게 되었다. 주인은 범상치 않은 도사임을 깨닫고 허리 굽혀 그 소원을 물은 즉, 원효스님은 1천명 제자의 식량이 부족하다는 사유를 말하였고 주인은 쾌히 해결해 줄 것을 승낙하였다. 그로부터 화엄벌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

운흥사 돌아온 괘불

운흥사 돌아온 괘불 18세기 최고의 화승 의겸스님의 괘불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배에 실었으나 매번 모진 풍랑을 맞아 세번이나 실패하자 이것을 기희하게 여겨 제자리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여러 존상을 화면 가듣 그린 영산회괘불탱과 당시 글자가 투각되어 있으며 정교하고 다양한 형태의 청제 장식이 부탁되어 있는 괘불함은 함께 보물 제131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운흥사 용이 된 선묘 아가씨

운흥사 용이 된 선묘 아가씨 중국 등주에 도착하면서 몸이 불편하여 한 불자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 집에서 선묘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선묘는 첫눈에 반하여 의상을 유혹하지만 의상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스스로 평생 의상을 스승으로 삼기로 작정한다. 그 후,의상이 당나라에 머무는 동안 마음껏 공양을 하다가 의상이 귀국하자 용이 되어 따른다. 또 용이 된 선묘낭자는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먼저 자리를 잡고 저항하는 소승 잡배들에게 큰 돌로 변하여 공중으로 세번 날아올라 이들을 쫓아낸다. 그리고 선묘는 석룡이 되어 무량수전 본존불 대좌 밑에 머리를 두고 굽이를 틀어 그 꼬리 끝이 무량수전 앞뜰 석등 아래쯤에 묻혀 있다고 전한다.

용화사 중창설화

용화사 중창설화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천택사를 벽담 스님이 중창하여 용화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름을 바꾼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천택사를 중창하기 위해 벽담 스님은 미륵산 가장 높은 봉우리 아래에서 7일 동안 낮밤을 가리지 않고 미륵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회향하는 날 밤 스님의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당래교주 미륵불이다. 이 산은 미래세에 용화회상(龍華會上)이 될 도량이니 이곳에 가람을 짓고 용화사라 한다면 만세기 길이 전하리라.” 벽담 스님은 꿈속이 계시대로 절을 짓고 용화사라고 하였다.

쌍계사 눈속에서도 칡꽃이 피는 곳 쌍계사

쌍계사 눈속에서도 칡꽃이 피는 곳 쌍계사 삼법·대비 두 스님이 육조 대사의 사리를 중국 당나라로부터 모셔와 이곳에 모시고 절을 짓게 된 이야기가 각훈 스님의 「육조정상동래연기(六祖頂相東來緣起)」에 나와 있는데, 이는 곧 지금 쌍계사의 창건 배경이기도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법 스님은 평소 혜능 대사의 높은 덕망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714년(성덕왕 13) 육조 대사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견의 인연이 없음을 한탄 하였다. 그러다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인 금마 미륵사의 규정(圭晶) 스님이 당에서 돌아오며 육조가 직접 지은 법보단경(法寶壇經)을 가져와 그것을 읽어 보고는 가르침을 친히 듣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삼법 스님은 그 글에서, "내가 간 후 5~6년에 나의 머리를 취할 ..

성흥사 창건설화

성흥사 창건설화 신라 흥덕왕 41년에 왜구 10만 여명이 부산과 제포(웅천)에 침범하여 나라가 어지러웠다. 왕이 크게 근심하며 신하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으나 아무도 현명한 방책을 말하지 못하였다. 근심 속에서 나날을 보내던 왕에게, 어느날 한 신령이 현몽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의 나라 지리산중에 무염(無染)이라는 한 스님이 있으니, 금산(金山) 보개여래 (寶蓋如來)이 후신으로 불가사의한 신력이 있어서 늘 천신들을 거느리고 있다. 가히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구제할 인물이니라. 또 서남쪽에 불모산이 있으니 산명수려(山明秀麗)하여 상서로운 구름이 항상 떠 있어 진리를 닦을 사람이 찾을 만한 곳이로다.” 이에 왕은 예사로운 징조가 아니라 여기고 사람을 불러 무염스님을 모셔오도록 하였다. 명을 받..

성주사 창건설화

성주사 창건설화 성주사 창건설화는 두가지가 전해온다. 첫번째 설화는 9세기 통일신라는 왜적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가 무척 많았다. 특히 동·남해안 지대에 왜구의 피해가 극심하였는데 827년에도 왜적이 배를 타고 대규모로 신라를 공격해 왔다. 왕이 근심하며 방책을 강구하였으나 5일이 지나도록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지리산에 무염이라는 승려가 있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면 해결책을 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왕은 바로 사람을 보내어 무염 스님을 모시고 오도록 하였다. 무염 스님은 왕의 고민을 듣고는, 쾌히 왜병을 격퇴하겠다고 말하였다. 스님이 들고 다니던 석장(錫杖)을 산 위에 꽂고 왼손으로 자신의 배를 치니 천지가 진동하는 우뢰와 같은 소리가 났다..

벽송사 상민스님에 얽힌 이야기

벽송사 상민스님에 얽힌 이야기 옛날 벽송사에 머물던 서룡 상민 (瑞龍詳玟, 1814~1890) 스님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상민 스님은 노년에 벽송사에 있었는데, 입적에 앞서 제자들을 불러 그믐날 입적할 날을 알렸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날은 바쁘니 다른 날로 부탁하였다. 스님은 얼마 뒤 다시 제자들에게 정월 초이튿날 입적하겠다고 하니, 제자들이 그 날은 불공드리러 오는 신도들이 많아서 다시 며칠을 미뤄달라고 하였다. 초나흘, 상민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가도 되겠느냐?” 라고 묻고 입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