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 어둠속 등불 1390

서오능의 전설

서오능의 전설 숙종 대왕이 수원 으로 민심 을 살피고저 평복으로 서오능 쪽으로 가는 도중 어느 총각이 시신 관 을 붇들고 슬프게 울고 있어 왕은 총각에게 묻는 다 여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시신입니다"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짐짓 알면서 딴청으로 묻는다) 묘를 쓰려고 합니다." 짐작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숙종이다. ​여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려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인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

장유사 장유화상의 설화

장유사 장유화상의 설화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장유화상의 행적이 설화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장유화상(長遊和尙)은 허왕후의 오빠로 보옥선인(寶玉仙人)이라고도 하며 수로왕의 7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으며 지리산에 들어가 7왕자를 성불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리산 반야봉 칠불사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왕후는 모두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그 중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셋째는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장유화상을따라 가야산에들어가 3년간 불법을 수도했다. 왕후가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아들..

율곡사의 전설

율곡사의 전설 율곡사 대웅전을 중건 할 때인데 하루는 대목수 한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가 맡아서 짓겠다고 하였다. 절에서는 마침 목수를 찾고 있는중이어서 몇가지 물어보고 곧 일을 맡기게 되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 목수가 하는 일이라고는 매일 목침(木枕)만 다듬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기다린 것이 석 달이 되어도 목침 다듬는 일만 하고 있기에 답답한 스님이 목수 몰래 다듬어 놓은 목침 한 개를 감추어 버렸다. 그랬더니 며칠 뒤에 느닷없이 목수가 연장을 챙겨서 공사를 중단하고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주지가 그 연유를 묻자, 다듬어 놓은 목침이 모자라니, 이러한 정신으로는 이 큰 불사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떠나는 것이었다. 급한 김에 절이 발칵 뒤집혔는데 그 때 목침을 감추어 둔 스님이..

​원효사 부어도 부어도 차지 않은 바랑

천성산 원효사 전경 ​ ​원효사 부어도 부어도 차지 않은 바랑 ​ 원효스님이 중국에서온 1천명의 제자와함께 원적산내원암에 자리를잡은 뒤였다 그런데 워낙 많은 대중이라 식량이 부족하여 지금의 상북면 대석리 ‘모래불’이라는 동네에 거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원효스님은 쌀 한 되 가량 들어갈 수 있는 바랑을 가지고 시주를 구하러 갔다. 하인이 쌀 한 되를 가지고 나와 바랑에 부으니 반도 차지 않았다. 이상히 생각한 하인은 또 한 되를 넣고 이를 거듭하여도 여전히 차지 않아, 너무도 이상한 사실을 주인에게 고하게 되었다. 주인은 범상치 않은 도사임을 깨닫고 허리 굽혀 그 소원을 물은 즉, 원효스님은 1천명 제자의 식량이 부족하다는 사유를 말하였고 주인은 쾌히 해결해 줄 것을 승낙하였다. 그로부터 화엄벌에 집을..

운흥사 돌아온 괘불

운흥사 돌아온 괘불 ​ 18세기 최고의 화승 의겸스님의 괘불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배에 실었으나 매번 모진 풍랑을 맞아 세번이나 실패하자 이것을 기희하게 여겨 제자리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여러 존상을 화면 가듣 그린 영산회괘불탱과 당시 글자가 투각되어 있으며 정교하고 다양한 형태의 청제 장식이 부탁되어 있는 괘불함은 함께 보물 제131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운흥사 용이 된 선묘 아가씨

운흥사 용이 된 선묘 아가씨 ​ ​의상은 중국 등주에 도착하면서 몸이 불편하여 한 불자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 집에서 선묘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선묘는 첫눈에 반하여 의상을 유혹하지만 의상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스스로 평생 의상을 스승으로 삼기로 작정한다. 그 후,의상이 당나라에 머무는 동안 마음껏 공양을 하다가 의상이 귀국하자 용이 되어 따른다. 또 용이 된 선묘낭자는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먼저 자리를 잡고 저항하는 소승 잡배들에게 큰 돌로 변하여 공중으로 세번 날아올라 이들을 쫓아낸다. 그리고 선묘는 석룡이 되어 무량수전 본존불 대좌 밑에 머리를 두고 굽이를 틀어 그 꼬리 끝이 무량수전 앞뜰 석등 아래쯤에 묻혀 있다고 전한다.

증심사 창건설화

증심사 창건설화 증심사는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독특한 연기설화를 지니고 있다. 아득한 옛날 무주 땅에 한만동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야기는 한씨가 태어나기이전, 그의 할아버지가 태수벼슬을 할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할아버지인 한태수가 며느리를 보기 위해 날짜를 잡아놓은 어느 날이었다. 그 집에는 기운은 장사지만 술을 좋아하고 싸움을 잘하여 매번 말썽을 일으키곤 하는 ‘득’이라는 하인이 있었는데, 한태수는 그에게 심부름을 보냈다. 그런데 몇 시간이면 넉넉히 다녀올 곳을 온종일이 지난 뒤에야 엉망으로 취한 채 비틀걸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태수는 화가 치솟아 불호령을 내렸다. “네 이놈! 명을 받아 일보러 간 놈이, 감히 어디 가서 술에 취해 이제야 오는거냐!” “이 노릇도 못해먹겠다.” 득이는 허..

통도사 스님을 사모한 처녀

통도사 스님을 사모한 처녀 ​ 언제인지 분명치 않지만 통도사에서 가장 높은 산내암자 백운암에 홍안의 젊은 스님이 홀로 경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장차 훌륭한 강백이 되기를 서원한 이 스님은 아침저녁 예불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기원하면서 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직 산기슭 군데군데에 잔설이 남아 있던 어느 봄날, 스님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저녁 예불을 마치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경을 읽고 있었다. 문든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아리따운 아가씨의 음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스님, 계십니까?” “뉘신지요?” 문을 연 스님은 이번엔 귀가 아니라 눈을 의심했다.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처녀가 바구니를 든 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늦은 시각, 이렇게 깊은 산중에 웬일이십니까?” “소녀, 친구들과 ..

축서사 창건설화

축서사 창건설화 신라시대에 강원도 수다사(水多寺)에서 수도하던 자장율사가 태백산을 찾아 헤매던 "문수보살"이 이 산에 화현하였다하여 문수산이라 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누다에 고관대작과 노승성불(老僧成佛)이 난다는 전설이 있으며, 문수산은 독수리가 우크리고 앉아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축서사가 자리잡은 터는 독수리가 짐승을 낚아채는 순간의 형국이라 해서 축서사로 명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불법에서 "날카로운 지혜"는 독수리의 부리와 같은 이치에서 대승 보살중에 지혜가 날카롭고 뛰어난 문수보살의 이름을 따서 문수산 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다고도 한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물야면 개단리의 결단이라는 곳에 지림사(智林寺)라고 하는 절이 있었는데,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한지 얼마 후 어느..

재물을 탐한 과보

재물을 탐한 과보 옛날 한 노스님이 제자를 데리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얼마를 가다 다리 하나가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노스님은 다리를 건너지 않고 물로 들어가 개울을 건넜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제자가 여쭈었습니다. "왜 스님께서는 편안한 다리를 두고 힘들게 물로 가십니까?" "너는 모를 것이다, 이 다리를 놓을 때 내가 화주에게 재물을 맡 겼더니 재물의 반 이상을 착복하고 다리를 이렇게 대충 놓았다. 그 과보로 인해 화주는 구렁이가 되어 여기 살고 있으니 보고 싶 으면 나를 따라오너라." ​ 제자가 노스님을 따라 다리 밑에 이르렀는데 노스님께서 한 편을 독송하자 큰 구렁이가 다리 밑에서 기어나왔고, 그 뒤를 따라 여러 마리의 작은 뱀들이 기어나왔습니다. "저 작은 뱀들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