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스님 좋은 말씀 2443

아득한 세상사

임행자는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적막한 산의 고요 속에서, 발자국 하나 없이 쌓인 눈 속에서,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는 절의 적요 속에서 그 무언가를 기다려 본다. 그렇지만 그이는 그 기다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산문에 나와 저 멀리 끝간 데 없이 구부러져 있는 눈 쌓인 길을 망연히 바라보기도 하고, 앙상한 가지 위에 쌓인 눈을 흔들어 털어내 보기도 하지만 알 수 없는 기다림은 깊어져갈 뿐이다. 문득 그이는 열 손가락을 다하고도 모자라는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 본다. 새삼 열다섯이라는 나이의 무게가 자신을 무겁게 짓누름을 느낀다. 어머니가 시집을 왔던 나이, 형이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했던 나이, 나는 ...... 그이는 절의 고요를 베고 누워 본다. 잠 속으로 도피를 하는 게 최선인..

하늘보고 침 뱉기

깊은 겨울, 깊은 밤, 어둠을 뚫고 불어오는 바람이 간혹 문풍지를 두드릴 때, 그 아득함은 얼마나 가슴저린가. 그 아득함에 너도 나도 화로 옆에 모여 앉아 긴 밤이 지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로 꽃을 피울 때, 정작 겨울의 의미는 이때 한껏 되살아나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손뼉을 치며 껄껄 웃는 소리에 촛불이 놀란 듯 방안에 출렁인다. 뛰어난 재담으로 큰스님들의 일화에서부터 옛날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난 원주스님은 목이 탄지 임행자에게 장독대에 가서 동치미를 떠오라고 하였다. 그이도 발그레한 볼이 더욱 붉어질 만큼 한바탕 웃고 난 뒤라 웃음기를 채 지워버리지도 못하고 문을 열고 나왔다. 어느새 내린 눈이 발목까지 쌓이고 있었다. 아무도 지나지 않은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그이는 ..

자비하신 원력으로 굽어살펴 주옵소서!

어제 종일 내린 눈이 무릎까지 쌓여 녹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하늘은 꾸무륵 하니 또 한 차례 퍼부을 기세다. 그래서 산 속 절의 스님들은 총동원되어 겨우내 땔감을 준비하러 산 속으로 올라갔다. 그 동안 위장병으로 고생하시던 큰스님도 이날은 운력에 동참하시어 지금은 그야말로 절간같이 고요한 시간, 열 네 살짜리 임행자만이 홀로 남겨저 절을 지키고 있다. 오후쯤 간식을 내와야 한다는 원주스님의 엄명(?)을 받은 그이는 있는 간식을 준비하고 싶은 마음에 연신 코를 훌쩍이며 절 마당과 후원을 쥐 드나들 듯 부지런히 드나들었지만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마음은 그득했지만 할 줄 아는 음식도 없고, 또 절에 만들 만한 재료도 없고......, 그러던 중 문득, 아랫마을 묘련화 보살님이 아무도 모르게 ..

돌고 도는 세상에서

깊은 겨울을 예견하듯 언제부터인가 나뭇잎들이 산 속 절에 깊게 내리고 있다. 휑휑한 나뭇가지 틈새로 아직도 채 생명을 저버리지 못한 나뭇잎이 하나 둘 겨우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쏴아아' 하는 산의 신음소리가 풍경소리보다 더욱 깊게 절 주위를 휘돌아가곤 한다. 쓸어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망연히 낙엽 위에 서서 임행자는 "아아아--!" 하고 소리를 내어보았다. 그 소리에 놀란 듯, 여기저기에서 몇 남지 않은 나뭇잎이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나뭇잎이 땅에 닿는 순간까지 그이는 집요하게 지켜보았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다 떨어져버린 잎들이 겨울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봄이 되면 다시 생겨나서 겨울엔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또 생기고...... 참말 알 ..

괴로워도, 슬퍼도

이른 아침 툇마루 끝에 나와 선 맨발의 감촉이 자꾸만 달라져간다. 싸늘하게 전해져 오르는 선선함이 임행자의 빡빡 깍은 머리 끝까지 타고 오는 듯싶다. 저 높이로 둥실 떠오르는 파란 하늘하며, 산 속 나무들의 색깔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그래, 바로 작년 이맘때쯤일 거야! 유난히 높고 파란 하늘 아래 총총하게 들어찬 나무들 사이로 웃음을 흩날리며 함께 뛰어다니던 그 친구들. 야생밤나무 밑에서 그 까칠한 밤송이들이 머리 위로 떨어져도, 아픈 줄도 모르고 흔들어 따먹던 밤의 아릿한 맛. 집에서는 한창 추석 음식준비로 분주하고 어머님이 사오신 때때옷이 장롱 속에 들어 있고, 아!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던 그 시절. 뒷집 은철이는 머리에 이가 너무 들끓어 머리를 빡빡 깍아버려 모두들 까까중이라고 많이..

허망한 꿈

계곡물 소리가 자꾸만 유혹을 한다. '우당탕탕' 흘러내려 가는 소리가 '어서 오라' 고 임행자를 부르는 것만 같다. 큰스님과 대중스님들이 수도암이라는 산 속 암자로 모두 떠나고 난 지금, 간혹 들리는 그의 숨가뿐 소리만이 절의 적요를 달래주고 있다. 큰스님과 대중스님들의 방청소를 다 끝내고 마루 끝에 나앉은 그의 발간 얼굴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직 채 청소를 끝내지 못한 뒷마루와 앞마루, 그리고 절 앞 뒤 마당을 둘러보는 그의 마음은 자꾸만 계곡 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실은 스님들이 모두 가고 난 뒤 그이 나름대로 세워놓은 계획이 있었다. 산 속으로 올라가 지금쯤이면 알맞게 익었을, 어름(국산 바나나)과 산머루를 잔뜩 따먹고는 시원한 계곡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참이었다. 그런데 그의 속마음..

호박꽃도 꽃이다

"임행자야, 어서 이리 나와 봐라. 여기 곳곳에 네 머리통이 있다. 늘 임행자를 상대로 장난을 치는 원주스님의 장난기 섞인 소리에 그이는 '이번엔 당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느릿느릿 걸어나갔다. 원주스님은 절 아래쪽 밭에서 그이를 보고 웃고 계셨다. 거기는 바로 봄에 그이가 빠졌던 호박똥구덩이가 있던 자리였다. 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그의 빡빡 깍은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아침녘에 삭발한 그의 머리는 반들반들 햇빛 속에서 윤이 나고있었다. "와!'' 밭으로 내려간 그이는 저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여기저기 조그맣게, 동그랗고 길다란 호박들이 매달려 있었다. "저기 저, 네가 빠졌던 넝쿨호박 똥구덩이에서 나온 저 호박이 조금만 더 크면 바로 네놈 머리통이랑 똑같겠다." 아니게 아니라 동글동글하니 임행..

스님과 산신

원규선사가 숭산 방오의 토굴에서 살 때, 일찍이 산신을 위해 계를 준 적이 있는데, 하루는 어떤 이인이 높은 관과 넓은 옷깃 차림으로 왔는데 따라온 사람이 아주 많고 걸음걸이가 느긋했으며 큰스님을 뵙겠다고 말했습니다. 스님이 그의 모습을 보니 매우 특이하기에,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진이여 잘 오셨습니다. 무슨 일로 여기 오셨는지요?" 그가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스님이 말하기를, "나는 부처와 중생을 평등하게 한눈에 봅니다. 그러니 어찌 분별하겠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저는 이 산의 산신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스님께서는 한눈에 저를 본다고 하십니까?" 스님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태어나지 않았는데 당신이 어찌 죽일 수 있습니까?" 산신이..

불법을 등불 삼아 방일하지 말고 정진해야

오늘 불자님들에게 제가 전할 주제는 자등명(自燈明)법등명(法燈明)입니다. 열반경에 이르는 부처님 열반의 모습은 대략 이러합니다. 부처님의 나이 이미 80에 이르신 까닭에 현신은 늙고 쇠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연세가 많아지면서 제자들에게 "나는 등이 아프다. 잠시 쉬고자 한다" 말하신 뒤 상수 제자로 하여금 설법을 대신하겠다는 장면이 간간이 등장합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임종할 시기를 아시고 시자 아난다 외 많은 비구들을 이끌고 라자가하에서 안파랏티카로, 다시 나란다를 거쳐 파타리풋타로 유행하면서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을 위해 귀중한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 여행 도중 더위와 장마를 이기지 못해 병환이 나셨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 왔지만 부처님은 정신력으로 그 병을 이겨냈습니다. 부처님이..

인과응보(因果應報)

-지광스님- 인과의 보(因果의 報)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 계실 때 아난이 물었습니다. 를 공경치 않고 계.정.혜 삼학(三學)을 귀중하게 여기지 아니하며 부모에게 효도를 행하지 않고 세상에 나서 인간으로 탈을 쓰고 살면서도 행할 바를 모르며 육근(六根)은 온전치 못하고 고 통으로 한 평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가득한 가운데 그들 가운데도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삶을 누리지 못하니 그 인연과 업보를 설명해 주소서. 인과의 도리를 통달하신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와 저희들과 저 말법시대의 중생들을 위해 일러 주시옵소서.”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전개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의 근본적인 이유를 물은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착하고 착하도다. 이 세상의 모든 남녀가 잘 살고 못 살고 귀하고 천하며 끝없이 ..